22화. 첫 쌀
도시에 쌀이 다시 진열되는 날의 풍경을 나는 뉴스로 봤다.
마트 앞에 선 줄은 없었다 — 협약 체제의 첫 번째 변화였다. 배급이 끝나고 일반 판매가 재개됐는데 줄이 안 섰다. 살 수 있게 됐으니까.
대신 진열대 앞 사람들의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다.
쌀을 들어 올리고 가격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봉쇄 전보다 18% 비싼 가격에 "이제 이게 정상이구나"라는 얼굴들.
한 아주머니가 쌀 포대를 만지며 말했다 — 카메라에 잡힌 한마디.
「예전엔 싸게 샀는데」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근데 이제 이 가격이 맞는 것 같아요.」
가격이 '합리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12,900원이 비싸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번 달이 지나면 줄어들 것이다. 인간은 정상도 적응하니까.
그리고 '정상'이 된 가격은 더 이상 협상 대상이 아니다. 그냥 세상의 가격이 되는 것.
소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팀장, 장부 다시 쓴다.」
「뭘로?」
「곡물이 들어오니까 장이 살아나. 쌀을 교환하는 게 아니라 이젠 쌀'로' 교환해 — 쌀이 다시 값의 기준이 됐어. 근데 값이 달라졌어. 봉쇄 전엔 쌀 1kg에 노동 2시간이었는데 지금은 3시간 반이야.」
「협약 가격 때문?」
「맞아. 12,900원. 다들 그 가격으로 생각을 바꾸고 있어. 조합이 정한 숫자가 '공평한 숫자'가 되는 중이야.」
소담의 다음 메시지가 의미심장했다.
「근데 희한한 게, 사람들이 그걸 나쁘게 안 봐. 52일 굶다가 밥이 와서 그런지, 가격보다 '온다'는 게 중요해졌어. 우리가 뭘 받아들였는지 다들 아는데 굶었으니까 받아들이는 거야.」
협약 부속서를 밤새 읽었다.
본문은 다들 봤지만 부속서는 아무도 안 봤다. 내가 보니까.
부속서 7장 2항:
「본 협약의 가격·몫 체계는 다음 수확기에 재심의된다. 재심의 요구권은 서명 당사자 전원에게 있다.」
재심의.
다음 수확기에 다시 테이블을 연다는 뜻이다. 가격은 한 번 정하면 끝이 아니라 매년 다시 정해진다 — 서명자 전원의 합의로.
합의라는 단어를 믿을 수 있는가.
조합이 원하면 매년 조건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고 각국이 거절하면 매년 밸브를 잠글 수 있다는 뜻이다. 영구한 평화가 아니라 매년 갱신되는 평화.
평화에도 구독이 생긴 거였다.
부속서를 더 읽었다. 다른 조항도 있었다.
부속서 3장: 「생산 주체의 대표는 조합연합이 한다. 각국은 조합연합과의 직접 협상만 인정한다.」 — 개별 농가 개별 기업 개별 국가와의 협상은 무효. 조합의 '통합'을 법적으로 못박는 조항.
부속서 5장: 「자급등록 구역의 관리는 감사망의 연례 심사로 한다. 심사 기준은 부속서 3장과 별도 지침을 따른다.」 — 내가 바꾼 '갱신제'가 구체화된 문장. '관리'와 '심사'는 한 끗 차이지만 이 문장에서 자급구역의 미래가 달렸다.
부속서 11장: 「감사망의 데이터 소유권은 공동이다.」 — 내가 제안한 감사망의 데이터를 조합도 본다는 조항. 구멍을 뚫었더니 그 구멍으로 양쪽이 서로를 보게 됐다.
부속서 13장: 「본 협약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조합연합 이사회의 해석에 따른다.」 — 문서 바깥의 것까지 조합이 해석한다는 조항. 규정이 없는 것도 조합 것.
신질서의 일상도 그날부터 시작됐다.
뉴스에 '식량 예비력'이라는 새 지표가 등장했다 — 각국의 자급 역량과 비축량을 종합한 나라의 눈금처럼 쓰이는 숫자. 나라의 곳간 깊이를 재던 옛 자 대신 앞자리에 오는 숫자가 될 거라는 전망과 함께.
각국에 식량 비축 의무가 생겼고 '농업 인력'이라는 범주가 국가 통계 최상위로 올라왔다. 경시당하던 직업이 헌장 하에서 존경받는 직업이 되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다만 그 존경에는 별표가 달려 있었다 — '조합이 허락한 농업'에만.
새로운 질서의 특이한 점은 저항감이 없다는 거였다. 다들 받아들였다. 굶다가 밥을 얻은 사람들이 '이게 새 질서'라는 문서를 서명하는 게 놀라운 게 아니라 당연해 보였다. 52일은 길었다 — 길어서 어떤 질서라도 그 자리를 채우기만 하면 환영받는 시간.
정우가 말했다.
「팀장님, 저기서 일하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조합 레일을 관제하는 거요. 우리가 멈춘 걸 보다가 이젠 그들의 레일을 돌리는 거잖아요.」
정우의 말이 맞았다. 관제는 중립이 아니라 봉사였다 — 누구의 레일을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일.
도시의 구인 공고도 바뀌었다. 며칠 전까지 '구인 없음'이었던 물류 업계에 이제 '조합 인증 레일 배차 담당'이라는 새 직군이 생겼다. 조합의 레일 위를 누가 관리하는가 —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정우에게 문자가 왔다.
「팀장님, 회사가 관제팀 복귀 제안했어요. 근데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조합 레일 인증 관제사' — 새로 만든 자격증이래요.」
「보수는?」
「1.3배 올랐어요. 농업 관련 직종이라서요.」
웃음이 나왔다. 농업 관련 직종 — 물류 관제가 농업 관련 직종이 된 세상.
아버지와 나눈 첫 제대로 된 끼니는 그날 저녁이었다.
자급구역의 쌀로 지은 밥. 장독대 아래 병의 후손인 씨앗이 아니라, 아버지가 올해 거둔 비변형 쌀 — 조합 라이선스가 아닌, 마을의 씨앗으로 자란 쌀.
밥을 지으며 아버지가 물었다.
"도시 밥은 어때."
"…조합 쌀이요?"
"그래."
"밥이에요. 그냥 밥."
"여기 건 다르지."
아버지가 말한 '다르지'의 뜻은 밥맛이 아니었다. 밥을 짓는 사람의 손이 다른 거였다.
"이게 자급구역의 밥이에요?"
"맞아."
"맛이… 다른가요?"
"모르겠어." 아버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쌀은 쌀이야. 근데 이건 네가 물을 준 게 아니고 조합이 허락한 게 아니야. 그 차이가 맛을 바꾸는지는 나도 몰라."
밥을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도시는 지금 조합의 쌀을 먹고 있다. 협약 가격에 사서 협약 레일로 옮겨진 쌀. 그리고 여기 나는 협약 바깥에서 자란 쌀을 먹고 있다.
같은 밥인데 다른 밥.
밥을 다 먹고 아버지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몰라요.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 아버지가 말했다. "여기 남을 필요 없어. 자급등록은 등록한 사람이 지키는 거고 너는 등록 안 했으니까. 대신."
아버지가 안방에서 작은 봉지를 가져왔다.
종이 봉지 안에 씨앗이 들어 있었다.
"장독대 병에서 나눈 거야. 아주 조금이야. 가서 심어봐. 싹이 나는지 확인해봐."
"여기서 안 자라요? 도시에서요?"
"모르겠어." 아버지가 말했다. "씨앗은 흙을 타. 근데 확인할 가치는 있어. 싹이 나면 네가 알게 되고 안 나면 세상이 알게 될 테니까."
나는 봉지를 받았다.
가벼웠다. 병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런데 봉지를 쥔 손이 떨렸다.
씨앗 몇 알이 이렇게 무겁다니. 52일 동안 지켜온 것들 — 이 작은 것들이 세상의 무게를 재는 추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