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헌장
서명일은 봉쇄 52일째로 잡혔다.
각국 대표가 모인 화상 서명식 — 코로나 이후로 유행한 원격 의전. 화면 속의 대표들이 순서대로 전자 서명을 넣었고 마지막으로 조합연합 총대가 서명했다.
서명식의 분위기는 장례식과 닮아 있었다. 다들 정장을 입고 차례차례 서명을 넣었지만 승자가 없는 서명식이었다. 한 나라 대표가 서명 버튼을 누를 때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 뭔가를 중얼거린 게 분명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조합연합 총대가 서명했다 — 연합의 이름으로 대표 대신 '생산 주체'라는 서명란에. 국가 대표들은 '정부'라는 단위로 서명했고 조합은 '생산 주체'라는 단위로 서명했다.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같은 문서에 이름을 올렸다.
오경재 본부장의 서명 순서는 열세 번째였다. 화면 속에서 그가 서명을 넣는 손을 봤다 — 떨리지 않았다. 군인 출신답게 그는 '이것이 굴복임을 알지만 절차를 지키는' 사람처럼 보였다.
서명한 문서는 두 겹이었다. 겉은 「식량가격 안정화 협약」 속은 「신농업헌장」.
헌장 전문의 한 줄이 그날 세계의 법이 됐다.
quot;식량 생산은 문명의 제1 의무다."
그리고 그 뒤 조항들 — 생산 주체의 최상위 지위, 식량 가격의 생산자 결정권, 비인가 경작의 인증 의무 — 돈이 왕이던 세상의 사슬이 공식적으로 뒤집혔다. 쓰는 일과 돈 굴리는 일이 꼭대기였던 피라미드가 기르고 만드는 일이 꼭대기인 피라미드로.
요구 없는 봉쇄의 끝은 굴복의 문서화가 아니라 질서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2시, 관제 화면이 바뀌었다.
나는 자급구역 회관의 단말로 그 순간을 봤다.
4만 2천 개의 회색 점이 하나씩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회색에서 노란색으로 — '스탠바이'에서 '부팅'으로.
노란색에서 초록색으로 — '부팅'에서 '운행 준비'로.
52일 만에.
처음 바뀐 점 하나를 봤을 때 숨을 쉬지 못했다. 두 번째, 열 번째, 백 번째 — 회색이 물결처럼 초록으로 번져갔다. 색이 바뀌는 걸 보는 게 이렇게 가슴 벅찬 일인 줄은 몰랐다.
정우에게 메시지가 왔다.
「팀장님, 움직여요.」
「알아. 보고 있어.」
「4만 2천 대가 다 움직여요.」
「그래, 그날이 왔어.」
차들이 문을 여는 소리가 데이터로도 느껴졌다. 전국의 휴게소와 화물 터미널에서 주차돼 있던 인증 트럭들이 하나둘 깨어나 첫 수송 경로를 받아들이는 모습.
멈춰 있던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뉴스는 특보를 내보냈지만 현장의 소리는 조용했다.
첫 인증 수송대가 도시로 들어오는 장면이 생중계됐다.
차들이 고가도로를 지나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댓글을 달았다.
「저게 끝이야?」
그 댓글 아래로 답이 달렸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야. 이제 우리는 저들이 허락한 대로 사는 거야.」
그 댓글이 정답이었다 — 개방이 아니라 신질서의 첫날이었다.
고가도로 양옆으로 사람들이 서 있었다. 환호도 박수도 없었다 — 그냥 지켜보는 침묵의 관중들. 쌀이 도착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보다 다른 게 있었다.
안도와 인정.
밥이 다시 온다는 안도. 그리고 그 밥이 '조합의 허락'으로 온다는 인정.
화면 속에서 한 노인이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밥이 와요.」
그게 다였다. 두 달을 기다린 세상의 한마디가 '밥이 와요'였다 — 그 네 글자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기쁨도 패배도 안도도.
편대 선두 트럭의 매니페스트가 공개됐다.
적재물: 현미 24톤. 출발지: 전북 미곡종합처리장. 도착지: 서울 양곡센터.
그리고 그 아래 한 줄.
단가: 헌장 기준 단가 — 1kg당 12,900원.
봉쇄 전보다 18% 오른 가격.
12,900원이라는 숫자를 봤을 때 사람들이 느낀 건 분노가 아니었다. '비싸다'가 아니라 '이게 이제 우리의 가격이구나'라는 인정. 18%라는 수치는 조합이 정한 '생산 주체의 권한'이었다 — 소비자가 협상할 수 없는 선언된 가격.
밤 뉴스에 '값'의 물결을 읽는 평론가가 나와 해석했다.
「가격이 오른 게 아닙니다. 가격이 '정해지게' 된 겁니다. 오르는 건 변동이지만 정해지는 건 체계입니다.」
그 평론가의 표정은 덤덤했다 — 분석할 수 있으니 분석하는 사람의 얼굴. 그가 말하지 않은 걸 나는 알았다: '정해진다'는 건 '누가 정하는가'가 답이 있다는 뜻이고 그 답이 '조합'이라는 뜻이었다.
그 가격이 이제 '세계질서'였다. 헌장으로 못박힌 조합이 정하고 세상이 인정한 가격. 생산하는 쪽이 정하는 가격을 소비하는 쪽이 받는 구조 — 그게 이제 상식이 됐다.
서명식이 끝난 뒤에도 관제 화면은 계속 바뀌었다.
초록으로 돌아온 차들이 경로를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미곡처리장에서 도시로 항만에서 배급센터로. 52일 동안 멈춰 있던 선들이 다시 그어졌다. 관제 화면이 다시 지도가 됐다.
나는 자급구역의 단말로 그걸 봤다. 도시의 관제실이 아니라 여기 — 조합의 레일이 아닌 곳에서 조합의 레일이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이상했다. 멈추게 한 쪽과 움직이게 한 쪽이 같은 곳이니까.
이장이 와서 같이 봤다.
"움직이네."
"움직여요."
"52일 만에."
"네."
이장이 화면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저것들이 멈출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 이제 다시 멈출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 거고."
저녁에 아버지와 통화했다.
"풀렸어요."
"알아. 라디오서 들었어."
"쌀이 다시 올 거예요."
"그럴 거야."
"그리고…"
나는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14조, 지켰어요. 갱신제로 바뀌었어요. 조합이 심사 기준을 쥐는 조건이었지만 등록은 남았어요."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그 두 글자가 눈물이 날 만큼 무거웠다. 52일 동안 무엇을 지켰는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잘했어'가 나를 버티게 했다.
아버지가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다. 네가 한 일, 그거 이제 알아야겠다. 세상이 조합에 무릎 꿇었는데 네가 지킨 게 뭐냐면 '나중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야. 발판은 지금은 안 보여. 내년에 볼 거야."
첫 쌀이 도시에 도착한 밤 나는 자급구역의 마당에 앉아 있었다.
별이 보였다. 도시에서는 본 적 없는 별들.
아버지가 내 옆에 앉았다. 씨앗 병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우리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됐는지 정리하면 이랬다.
식탁은 돌아왔다. 가격은 안정됐다 — 조합이 정하는 안정으로. 유통은 일원화됐다 — 조합 인증 레일로 영구히. 그리고 자급등록은 남았다 — 조합의 심사권 아래서 숨 쉬는 한 계속 살아가는 예외로.
이긴 걸까, 진 걸까.
아버지에게도 혜성에게도 묻지 못한 질문을 밤하늘에 물었다.
밤하늘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논에서 벌레 소리가 들렸다 — 씨앗이 자라고 있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