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청원하는 나라
"공급 재개 요청서"라는 제목의 문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봉쇄 41일째였다.
정부 표현은 요청이었다. 실제로는 청원이었다.
각국이 차례차례 같은 길을 갔다. 어느 나라는 35일을 버텼고 어느 나라는 40일을 버텼다. 버틴 시간이 달랐을 뿐 도착점은 같았다 — '요청'이라는 이름의 백기.
뉴스에서 한 나라의 총리가 말하는 걸 봤다.
「우리는 국민의 식탁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모든 수단'이라는 말의 뜻은 곧 밝혀졌다 — 조합 문서에 서명하는 것. 수단이란 저항이 아니라 굴복이었다.
굴복의 과정은 순서가 있었다.
먼저 각국이 '공급 재개 요청'을 공식 발표한다 — 조합이 내놓으라는 문안을 거의 그대로.
다음으로 조합이 '안전 절차 진행 상황'을 공개한다 — 아무 결론도 없는 장문의 공지.
그리고 '협상 테이블'이 열린다 — 조합이 주최하고 각국이 참석하는 이름만 협상인 자리.
내가 거기 끼게 된 건 배차관제 경력 때문이었다. 오경재 본부장이 "유통 실무 아는 사람"을 찾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자급구역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였다 — 아버지 곁을 떠나 도시로 온 건, 협상 소식 때문이었다. 본부장의 호출이 관제팀을 통해 왔다. '이다솜 팀장, 식량비상대책본부 협상 지원단에 차출됐습니다.'
나는 걸어서 간 게 아니라 차를 타고 갔다 — 협상 요원에겐 이동 인증이 나왔으니까.
테이블에 올라온 문서는 두 겹이었다.
겉은 「식량가격 안정화 협약」 — 값 상한·바닥선, 몫 조정 절차, 분쟁 조정위원회. 예상대로의 것들.
속은 「신농업헌장」 — 협약이 시행되기 위한 '기초 체계'로 붙어 있는 선언문.
겉 문서를 합의하면 속 문서가 자동으로 따라오는 구조. 헌장 없이는 협약이 성립할 수 없는 하나로 묶인 패키지.
협상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 본부장이 문서를 넘겨주며 말했다.
"겉을 보면 무해한 협약이야. 근데 속을 보면 — 이건 질서 문서야."
나는 두 겹을 넘겨봤다. 겉은 기술 문서 속은 선언. 기술 문서는 숫자를 다루고 선언은 가치를 다뤘다. 그리고 가치는 숫자를 삼켰다 — 14조가 그 증거였다.
첫 협상 날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느낌은 묘했다.
각국 대표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 같은 목적 다른 나라. 대표들은 서로를 봤지만 위로를 주지 못했다. 각자 자기 나라의 굶주림을 들고 온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구할 방법이 없으니까.
조합 측 대표가 들어왔다. 마기정 — 글로벌정책본부장. 조합의 얼굴이 되는 이름.
그가 인사했다. 공손하게.
"각국의 어려움을 잘 압니다."
어려움이라는 단어 — 굶주림을 '어려움'으로 부르는 언어. 그 언어가 이 테이블의 규칙이었다.
조합 쪽 요구는 세 가지였다.
첫째 생산·가격 결정권의 인정. 몫과 바닥선을 조합이 정한다는 걸 조약으로 못박는 것 — 지금까지 사실상 해오던 걸 공식화.
둘째 유통 인증 레일의 일원화. 곡물이 움직이는 모든 경로를 조합 인증으로 묶는 것 — 이미 돼 있는 걸 다시 문서화.
셋째, 그리고 이게 중요했다 — 14조.
'비인가 경작 인증 의무화'. 자급등록 구역에 대한 재심사 권한을 조합이 가지고 인증되지 않은 경작을 금지하는 조항. 세계에 수백 명 남은 자급농을 소탕하는 문구.
협상단의 법률 자문이 그걸 해석해줬다.
"문장 자체는 '인증 절차 정비'로 읽혀요. 근데 실질 효과는 — 자급농이 인증을 받아야 생존하는 구조가 되는 거죠. 인증을 주는 주체가 조합이니까 인증의 칼자루를 쥐는 거고."
본부장이 협상 대표단 회의에서 내뱉은 말:
"3조까지는 받을 수 있다. 14조가 문제야."
"받으면 안 되는 겁니까?"
"받으면 자급구역이 끝나. 싹이 트는 씨앗을 가진 마지막 사람들이 없어져."
"안 받으면요?"
"안 받으면 계속 굶어. 선택지가 그거야."
다른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본부장님, 14조만 뺄 수 있을까요."
"조합이 왜 빼줘."
"…그럼 우리가 다른 걸 양보해서."
"다른 게 뭐야." 본부장이 테이블을 쳤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밥 달라는 나라가 무슨 카드를 쥐고 있어."
그날 회의가 끝나고 나는 혼자 회의실에 남았다. 문서를 다시 봤다 — 14조를 둘러싼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문구의 기술이었다. '인증 의무화'와 '갱신 심사' 사이에 있는 공간 — 조합이 원하는 건 '인증 의무화'이고 우리가 만들려는 건 '갱신 심사'다. '의무화'는 죽이는 문장이고 '심사'는 지켜보는 문장이다.
헌장 초안을 다시 읽었다.
전문 — "식량 생산은 문명의 제1 의무다."
이 한 줄이 이 문서의 전부였다. 나머지 조항은 이 문장을 지키는 절차들이었다.
돈이 왕이던 세상의 사슬이 공식적으로 뒤집히는 순간. 쓰는 일과 돈 굴리는 일이 꼭대기였던 피라미드를 기르고 짓는 일이 꼭대기인 피라미드로 뒤집는 문서.
조합이 원한 건 돈이 아니었다. 질서였다.
그리고 그 질서에 이름이 있었다 — '신농업주의'. 돈이 왕이던 세상의 대안이자 그 세상의 약점을 바로잡는 가르침. 먹는 것이 먼저이고 먹는 것을 만드는 쪽이 가장 귀하며 그 귀한 일을 관리하는 자가 세상을 다스린다는 교리.
내 역할은 거기서 정해졌다.
"우리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정직한 숫자를 보여줘."
본부장의 지시였다.
봉쇄 41일 기준 실질 동원분 6일. 대중이 '버틸 수 있다'고 느끼는 감각과 '실제로 버틸 수 있는' 숫자 사이의 간극.
나는 그 숫자를 두 가지로 계산했다 — 조합에 보여줄 숫자와 우리가 실제로 아는 숫자. 둘은 달랐다. 조합은 우리가 6일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비상 절차를 쓰면 8일까지 당길 수 있었다. 그 2일이 협상력이었다.
"협상의 유일한 카드예요. 시간."
시간이 끝나면 협상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는 걸 테이블 위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14조가 뭔지 알아?"
"알아. 자급농 소탕."
"받으면 없어져. 거기가."
아버지는 오래 침묵했다.
"그래도 받게 될 거다. 사람들이 굶고 있으니까."
"그럼 너희는?"
"너희가 지킬 걸 지켜. 14조를 바꾸는 건 불가능해 보여도 '재심사 조항'으로 바꾸는 건 가능할지도 몰라. 죽이는 문구를 지켜보는 문구로."
아버지가 덧붙였다.
"죽이는 문구와 지켜보는 문구는 한 글자 차이야. 죽이는 문구는 '금지한다'고 쓰고 지켜보는 문구는 '관리한다'고 써. 조합은 관리를 좋아해 — 관리하면 없앤 것보다 오래 간다는 걸 아니까. 네가 그 문구를 쥐여주면 돼."
그날 밤 나는 협상안 초안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문구 하나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고. 14조의 대안 문구 — '비인가 경작 활동의 인증 의무화'를 '자급등록 구역의 갱신 심사'로. 한 단어 차이가 세상을 바꾼다는 걸 알면서도 그 한 단어가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었다.
새벽까지 썼다. 밤이 밝아올 때쯤 초안이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