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17 / 25 목차
4부 · 현재로 온 경위

17화. 신농업선언

파일은 두 겹이었다.

겉은 타임스탬프 로그 — 스탠바이 명령이 검은이삭 첫 보도보다 4분 빨랐다는 증거. 그건 이미 알고 있던 것의 확인이었다.

안쪽이 문제였다.

「신농업선언(안)」. 제목 아래 조합연합 내부 문서 등급이 박혀 있었다 — 비공개, 최고.

혜성이 메시지를 붙였다.

「이거 어디서 구했는지 묻지 마세요. 보고 나서 판단하세요.」

나는 마을 회관 한 켠 불이 나가지 않은 유일한 등 아래서 문서를 열었다. 단말기 화면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 통신이 약한 산골이라 파일이 덜 로드되기도 했다. 그래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문서를 밤새 읽었다.

선언문이라기보단 헌장 초안이었다. 조항이 나뉘어 있고 각 조항에 근거와 시행 방법이 붙어 있었다.

핵심은 전문 한 줄이었다.

quot;식량 생산은 문명의 제1 의무다."

문장 하나가 세상을 뒤집는다는 건 이런 거였다. '제1'이라는 단어 — 다른 모든 것의 위에 서는 우선순위. 의무라는 말 — 선택이 아니라 강제. 그리고 '문명'이라는 말 — 나라나 장터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단위.

그 다음 조항들:

제1조 — 식량 생산과 유통은 인류 공동체의 최우선 의무이며 다른 모든 일은 이 의무에 종속된다.

제3조 — 식량 생산 주체는 세계질서의 최상위 지위를 가지며 그 권한은 국제 조약으로 보장된다.

제7조 — 식량 가격의 안정은 생산 주체의 권한이며 소비 주체의 요구에 의해 변경될 수 없다.

제11조 — 비인가 경작은 제1 의무의 통일을 해치는 행위로 인증과 허가를 받은 생산만이 정당하다.

그리고 더 있었다 — 스크롤을 내리면 나오는 부속 조항들. 제5조 '생산 주체의 대표성은 조합연합이 국제 사회에 대표한다', 제9조 '비인가 유통 경로는 국제 공조로 차단한다', 제14조 '생산 주체는 자기 영역 내 경작 관리를 독자적으로 행한다'. 하나하나가 법률 문장 같았는데 이건 법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 법이 되기 전의 선언.

제14조를 읽을 때 멈췄다. '독자적으로 행한다'는 말 — 자급구역도 그들 영역으로 넣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4분 로그와 이 문서를 나란히 놓고 봤다.

조합이 아무 요구도 안 한 이유가 보였다.

요구가 있는 건 협상이다 — '우리에게 이걸 달라'. 협상에는 타결이 있다. 양보가 있다. 끝이 있다.

이건 요구가 아니라 선언 준비였다. 선언에는 타결이 없다 —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계속 굶는다.

봉쇄는 가격 압박이 아니었다. 이 문서를 위한 전주곡이었다.

그리고 문서를 다시 읽다가 선언 뒤에 붙은 '시행 예정일' 란이 비어 있는 걸 봤다. 비어 있는 날짜 —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건 문서가 아니라 세계의 대답이었다. 세계가 언제 굴복하는지를 기다리는 비어 있는 칸.

일정표를 다시 봤다. 검은이삭 사태 → 비상 선언 → 유통 일원화 → 스탠바이 → (공백) → 「신농업헌장」 비준 → 개방. 공백 칸에 있을 단어는 '세계의 굴복'이었다 — 그리고 그 굴복을 이끌어내는 장치가 이 문서를 미리 보여주는 것.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 너희는 스스로 선택하게 될 거다'라는 확신.

"가격이 아니었어요."

나는 혜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자급구역 통신이 약해 화상은 안 됐지만 문자는 닿았다.

"가격 협상인 줄 알았어요, 전부."

답이 몇 분 뒤에 왔다.

"가격은 겉이야. 속은 질서야. 생산하는 쪽이 언제나 밑바닥이었던 세상을 — 자기들은 그걸 바로잡으려는 거예요."

"그래서 신농업주의?"

"신농업주의. 돈이 왕이던 세상이 식탁 위에 세워졌다는 걸, 식탁을 뺐을 때 남는 것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혜성의 다음 메시지가 이어졌다.

"가격을 원하는 사람은 가격을 내놔요. 근데 이 사람들은 가격을 안 내놨어요. 가격은 도구일 뿐이야. 진짜 원하는 건 질서 — 자기들이 세계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를 주는 '원칙'이 되는 것."

경시의 역사가 떠올랐다.

"흙 파는 일"이라고 부르던 세상. 쌀이 당연해지면서 쌀을 만드는 일을 잊어버린 세상. 그 자리를 기계들이 채웠고 기계들은 '그 일'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물려받은 것들이 물려준 자들을 심판하는 구조.

농사를 경시한 자들에게 농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가르치는 이념.

문서를 두 번째로 읽을 때는 표현이 아니라 의도가 보였다. 헌장의 문장들은 법률가의 문장이 아니라 선언가의 문장이었다 — '해야 한다'가 아니라 '이다'로 끝나는 문장들. '식량 생산은 문명의 제1 의무다' — 조건도 예외도 없는 단언. 이념은 단언으로 세상을 만든다.

조항을 하나씩 내려갔다.

제1조 — 「식량 생산 활동은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한다.」 밑동 우선권의 법적 선언. 돈이 왕이던 세상에서 '우선'은 장터가 정하는 거였는데 헌장은 생산이 정하는 세계를 선언한다.

제5조 — 「생산 주체의 대표성은 조합연합이 독점한다.」 개별 농가나 기업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구조. '대표'를 통해 '통합'을 법제화하는 조항.

제9조 — 「인증되지 않은 경작·유통 활동은 헌장 질서의 침해로 간주한다.」 자급구역의 존립이 걸린 조항. '침해'라는 단어가 넓어서 이 조항 하나로 자급구역을 언제든 불법화할 수 있다.

제14조 — 「비인가 경작 활동의 인증 의무화.」 이미 봤다. 그리고 아직도 무섭다. 이 조항이 통과되면 아버지의 마을은 끝난다.

아버지가 문서를 봤다.

"저항은 못 이겨."

한참 뒤에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대안이 없어. 씨는 저것들 손에 있고 땅은 저것들이 관리하고 지식은 저것들이 가르치는 걸로 돼 있어. 저항할 재료가 없어."

"그럼 어떻게 해요."

"저항 말고 예외."

"예외가 뭔데요."

"저것들이 '우리 없이는 못 산다'를 보여주는데 우리가 '없이도 산다'를 보여주는 거지. 저항은 세상을 바꾸려는 거고 예외는 세상이 바뀌어도 남는 거야."

아버지는 문서의 11조를 가리켰다.

"저것들이 이걸 지우려 들면 우린 예외를 지켜야 돼."

아버지가 문서를 내려놓고 말했다.

"선언에는 조건이 없어. 조건이 없는 선언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헌장을 지키는 수밖에 없고 지키는 세상에서 우린 '예외'가 돼야 해. 저항 말고 — 저항은 지고 싶은 사람이 하는 거야."

그날 밤 조합 관찰관의 통보가 왔다.

자급등록 재심사가 협약 안건으로 올랐다 — 신농업헌장 초안에 포함된 비인가 경작 인증 의무화 조항의 시행 준비.

마을 회관에 사람들이 모였다. 통지를 읽은 이장이 말했다.

"재심사래. 뭘 재심사한다는 건지 아나."

"모르지." 아버지가 대답했다. "다만 우리가 '등록' 상태인 건 맞아. 근데 이제 그 등록을 다시 재겠다는 거야."

"재는 게 뭐야."

"우리가 '예외'로 셌나, 안 셌나."

회관에서 한 농민이 물었다.

"심사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아는 사람은 있었지만 말하기 싫은 사람들의 침묵이었다.

시범이 끝나고 선언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