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밥의 무게
자급구역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됐다.
닭이 울면 사람이 일어났고 사람이 일어나면 밭으로 나갔다. 모내기철이 아니라 추수철이라 마을 사람들은 하루 종일 벼를 베고 널고 털었다.
일어나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먼저 불이 켜지고 굴뚝에 연기가 오르고 밥 짓는 냄새가 퍼지고 그 냄새가 마을을 깨운다. 알람 없이 깨는 세상.
나도 베게 됐다.
아버지가 낫을 건네줬다.
"벼를 본 적은 있지?"
"봤죠. 사진으로요."
"사진이 아니라 손으로 봐."
낫을 쥐는 법을 배웠다. 벼는 기계만큼 빠르게 못 베지만 기계가 못하는 걸 한다 — 이삭 하나하나를 눈으로 보며 벤다. 익은 건 베고 덜 익은 건 두고 쓰러진 건 일으켜 벤다.
기계는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은 판단한다.
처음 한 시간은 어설펐다. 낫이 엇나가 벼를 잘못 베고 다리가 아파 허리를 펴지 못했다. 점심때쯤 아버지가 지나가며 한마디 했다.
"손이 먼저 움직이면 안 돼. 눈이 먼저야. 보고 판단하고 베는 거야."
오후가 되자 리듬이 잡혔다. 벼를 베는 건 생각이 아니라 몸의 일이었다 — 몸이 배우면 손이 알고 손이 알면 밭이 알았다.
벼를 베면서 나는 이 마을의 차이를 조금씩 알아갔다.
자급등록의 조건은 세 가지였다.
하나 자기 소비분만 경작한다. 판매는 엄격히 금지 — 판매하면 등록이 취소되고 조합 곡물로 전환된다.
둘 규모를 지킨다. 등록 면적을 초과하면 '비인가 확장'으로 간주해 역시 취소.
셋 조합의 '시찰'을 받아들인다. 관찰관이 정기적으로 와서 면적과 수확량을 확인한다. 거부하면 등록 취소.
즉 살아남되 작게 살아남는 조건이었다.
존재하되 위협이 되지 않을 만큼 작게.
아버지가 밭을 걸으며 조건을 설명해줬다.
"자급농은 외로운 농사야. 우리끼리 나눠 먹는 건 되지만 팔면 안 되고 남 주면 안 되고 키우면 안 돼. 셋 다 조합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라서. 그래서 자급농은 '개인'으로 등록되는 거야 — 조합이 조합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개인을 상대하는 거지."
"그럼 왜 해요?"
"왜 안 해." 아버지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우리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게 왜 이상한 일이 돼야 해. 조건이 가혹한 건 맞아. 근데 가혹한 조건 아래에서도 농사를 짓는 게, 조건이 없는 세상에서 농사를 안 짓는 것보다 나아."
그 세 조건이 가혹하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자급농은 스스로를 먹이는 권리만 갖는다 — 남을 먹이는 권리는 없다. 마을 사람들이 그 조건을 받아들인 건,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남는 것' 자체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조합의 세계에서 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리. 그걸 지켰다.
다음 날 새벽 아버지가 나를 깨웠다.
"나와라."
안개가 자욱한 논으로 나갔다. 낫 하나를 건네주며 아버지가 말했다.
"배워봐."
"뭘요?"
"베는 거."
나는 낫을 쥐고 벼를 잡았다. 한 움큼을 잡아 끌어당기듯 베어보려 했는데 이삭이 낫을 타지 않았다. 아버지가 봤다.
"손이 먼저 움직이면 안 돼. 눈이 먼저야."
"뭘 봐요?"
"익은 걸 봐야지. 덜 익은 건 남겨야 해. 베는 게 아니라 고르는 거야."
아버지가 손으로 시범을 보였다 — 낫이 벼 밑동을 스치는 순간 이삭만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몇십 년이 만든 손길이었다.
나는 다시 해봤다. 어색했다. 벼가 찢어지고 이삭이 흩어지고 손목이 아팠다.
"못하겠어요."
"처음이니까." 아버지가 낫을 거둬줬다. "농사는 몸으로 배우는 거야. 너네 세대는 눈으로 배웠지 — 화면으로. 화면으로 배운 건 잊어. 몸으로 배운 건 남아."
몸으로 배운 것 —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그게 이 마을이 가진 것의 본질이었다.
점심때 이장이 물었다.
"서울은 어떻던가. 밥이 없다지?"
"있어요. 줄이 길 뿐이에요."
"줄." 이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는 밭이 줄이야. 서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베고 건드리는 줄이지."
밥을 먹으며 이장이 덧붙였다.
"근데 말여, 이번 일이 이상한 걸 알아. 조합이 우릴 왜 관찰해? 원래 우리는 관심 밖이었어. 세상에 밥이 넘쳐날 때는 우릴 신경도 안 썼다고. 근데 봉쇄가 오니까 시찰이 잦아졌어. 세 번이나 왔다 갔어."
"뭘 보러 오는데요?"
"모르지. 면적 재고 수확 물고 씨앗 출처 물고. 우리가 뭘 하려는지는 안 묻더라고. 그냥 재고만 확인해. 재고를 세듯이."
옆에서 밥을 먹던 다른 농민이 말했다.
"시찰관들이 눈빛이 달라져. 전엔 기계 보듯 봤는데 이번엔 재는 눈으로 보더라."
"재는 눈이 뭐여."
"우리가 얼마나 있는지 재는 눈. 얼마나 오래 버틸지 재는 눈."
나는 그 말에 밥을 멈췄다.
재고를 세듯이.
조합이 자급구역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변수'로 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변수는 관리 대상이다.
오후 아버지와 나눈 대화.
논두렁에 앉아서 쉬는 시간 아버지가 물었다.
"도시에서 관제한다며. 멈춘 걸 본다며."
"네. 회색 점 4만 2천 대를 봐요."
"그거 보고 뭘 생각했어?"
"…세상이 잠겼다고요."
"잠긴 게 아니야." 아버지가 흙을 만지며 말했다. "합의된 거야. 차들이 각자 '나는 대기한다'고 합의한 거지. 잠근 건 밖이 아니라 안이야. 인증이라는 약속이지."
"그 약속을 깨려면요?"
"약속은 못 깨. 약속을 정한 사람이 바꾸는 거지. 조합이 그 약속을 풀어주겠다고 할 때까진, 차는 스탠바이야."
"그때까지 세상은 굶는데요."
"그게 시범이지." 아버지가 나를 봤다. "시범은 짧아야 하는데 이번엔 길어. 길다는 건 목적이 커. 조합은 뭔가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 뭔가를 가르치려는 거야."
"뭘 가르치려는 건데요?"
"경종 같은 거지." 아버지가 논을 바라봤다. "너희가 경시한 게 너희를 먹인다는 거. 농사가 '당연히 되는 것'이 된 세상은 그게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일인지를 몰라. 그걸 체험시키는 거야 — 밥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금융도 방산도 다 안다고."
아버지가 이어서 말했다.
"너희 세대는 우리 세대를 웃겼지. '흙 파는 일'이라고. 근데 웃긴 건, 웃는 사람들이 매일 밥을 먹었다는 거야. 밥 먹으면서 밥 짓는 사람을 웃겼어. 그 우스움이 지금 끝난 거야."
저녁 이장이 급히 찾아왔다.
"이판석, 온다."
"누가."
"시찰관. 방금 통보 왔어. 내일 오전."
마을에 기류가 바뀌었다. 집집이 창고 문을 닫았고 장독대 주변을 정리했고 씨앗 관련 물건을 감췄다 — 숨기는 게 아니라 '눈에 띄지 않게' 하는 방식이었다.
아버지도 장독대 아래 병의 흙을 다시 다졌다.
"시찰은 두렵지 않아." 아버지가 말했다. "규칙대로 오는 거니까. 두려운 건 그 규칙이 바뀌는 날이야."
밤 혜성에게서 온 파일이 단말에 도착했다.
자급구역은 통신이 약했지만 아주 죽은 건 아니었다 — 조합이 자기 영토의 통신은 끊지 않았으니까. 그건 역설적이었다. 봉쇄 안에서 연락은 된다. 곡물만 못 움직인다.
혜성이 보낸 파일은 로그였다.
스탠바이 명령의 발신 원문 — 명령이 작성돼 큐에 올라간 시각, 서명자 전파 경로의 전체 기록.
나는 파일을 세 번 읽었다.
손이 떨렸다. 파일을 읽는 게 아니라 증거를 읽는 기분이었다 — 뭔가가 우연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쓴 대본이라고 말하는 증거.
그리고 알았다.
명령이 작성돼 큐에 올라간 시각 20:52:11. 첫 보도 송출 시각 20:56:00.
4분.
명령은 보도보다 4분 먼저 세상에 나오기로 돼 있었다.
숫자 하나가 밤을 바꿨다. 이 봉쇄는 오염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다. 오염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오염이라는 이름을 붙인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