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테이블 위의 도시
협상은 서울이 아니라 제3국 중립 도시에서 열렸다.
나는 화상으로 참석했다 — 자급구역의 단말로 허름한 마을 회관에서. 200km를 걸어온 사람이 다시 화면으로 도시에 앉는 셈이었다.
테이블에는 세 명이 앉았다.
오경재 본부장 — 국가 측.
마기정 본부장 — 조합 측.
그리고 화면 너머의 나 — 숫자를 가져온 사람.
마기정은 예상과 다른 사람이었다.
화면에서 본 대로 온화했다.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세심하게 상대의 말을 들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 악의가 없는 사람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으니까.
그가 문서를 넘기는 손가락이 정갈했다. 농사짓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문서를 다루는 사람의 손. 조합은 농부의 조합이 아니라 관리자의 조합이었다 — 농사를 아는 사람이 만든 질서가 아니라, 농사를 '대표'하는 사람이 만든 질서.
첫 발언부터 정직했다.
"우린 팔 준비가 돼 있습니다." 마기정이 말했다. "공급을 재개할 준비는 언제나 돼 있었어요. 늦어진 건 우리가 아니라, 각국이 '살 방법'을 못 정해서였습니다. 오늘 그걸 정합시다."
오경재가 받았다.
"'살 방법'이라는 게 협약 체제를 받아들이라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마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요구한 적 없습니다. 각국이 무엇을 할 건지를 못 정해 지연된 거예요. 우리는 그저 안전을 확인하는 중이었고."
거짓말 같은 진술이었지만 법적으로는 진실이었다. 조합은 요구를 안 했다. 조합은 기다렸을 뿐이다. 요구가 없으니 '강요'도 아니었다.
중간 휴식 때 마기정이 문서 하나를 더 올렸다.
「신농업헌장」. 협약의 '기초 체계'로 붙은 선언문.
오경재가 표지를 넘기다가 물었다.
"이건 뭡니까. 가격협약과 무슨 상관이죠?"
"헌장 없이는 협약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마기정의 대답은 차분했다.
"우리는 가격을 원한 적 없어요. 가격은 도구예요 — 세상이 눈치채게 만드는 도구. 우리가 원한 건 질서죠."
"질서요?"
"식량 생산이 문명의 제1 의무라는 것. 생산하는 쪽이 언제나 밑바닥이었던 세상을 바로잡는 것. 돈이 왕이던 세상은 식탁 위에 세워졌어요 — 식탁을 뺐을 때 남는 게 너희의 진짜라는 걸, 이제 아시잖아요."
방이 조용해졌다.
그가 악의도 조롱도 없이 말했다는 게 제일 불편했다. 확신이었다 — '당연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차분함.
"농사가 경시된 건 인류가 만든 거예요."
마기정이 말을 이었다.
"쌀이 싸지자 쌀을 만드는 일이 사라졌죠. 시야에서. 그 자리를 우리가 채웠고 우리는 물려받은 걸 지키는 중이에요. 이제 물려준 자들에게 돌려줄 시간이에요 — 손에 흙 대신 질서를."
마기정이 잠시 멈췄다.
"우리가 하는 건 역사 수정이에요. 농사가 밑바닥이었던 역사를 — 농사가 정점인 질서로 바꾸는 것. 조합은 그저 그 교정을 집행하는 기구일 뿐입니다."
협약 초안이 페이지별로 넘어갔다.
대부분의 조항은 순항했다 — 각국이 이미 굴복할 마음이었으니까. 가격 결정권 인정, 유통 인증 일원화, 비인가 수송 금지. 큰 마찰 없이 진행됐다.
문제는 14조였다.
'비인가 경작 활동의 인증 의무화'.
마기정이 직접 설명했다.
"자급등록 구역은 비인가 생산입니다. 식품 안전의 관점에서 인증을 거치지 않은 생산은 허용할 수 없어요."
오경재가 받았다.
"자급구역은 자기 소비분만 경작합니다. 유통이 없으니 안전 위험도 없는데요?"
"유통이 없다는 걸 누가 보증합니까?" 마기정이 차분하게 반문했다. "비인가 생산물이 흘러나올 경로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는 경로를 차단하겠다는 거예요."
"그럼 유통 차단을 하면 되지, 생산 자체를 왜 금지합니까?"
"생산이 없으면 유통도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했다. 유통을 끊으려면 생산을 끊는 게 제일 깔끔하니까.
나는 개입했다.
"발언권 주십시오."
숫자를 냈다.
"자급등록 구역의 전체 생산량은 전 세계가 먹는 곡물의 0.003%입니다. 만약 이게 전부 유출돼도 값에 미치는 영향은 저울 눈금 아래입니다. 값을 흔드는 일이 아니에요."
마기정이 나를 봤다.
"누구세요?"
"이다솜입니다. 물류 데이터 산출 담당."
"이 씨, 숫자로는 그렇죠." 마기정이 차분하게 말했다. "0.003%는 가격에 영향이 없어요. 근데 가격은 숫자로만 서는 게 아니에요."
"무슨 뜻입니까?"
"예외가 있으면 이념이 안 섭니다."
그 문장이 방을 무겁게 만들었다.
마기정이 계속했다.
"헌장은 '우리 없이는 못 산다'는 전제 위에 서요. 세상이 '다른 길이 있다'고 믿으면 우리 질서를 받지 않습니다. 자급구역은 생산량으로는 무의미하지만 상징으로는 큽니다 —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증거니까. 그걸 지워야 헌장이 서는 거예요."
정직한 발언이었다.
조합이 지키려는 건 쌀의 가격이 아니라 '대안 없음'이라는 구조라는 걸 상대방이 직접 말해준 것이다.
오경재가 받았다.
"그럼 '갱신제'로 조정하죠. 인증 의무화라는 표현은 받되, 기존 등록은 갱신 심사로 존치하는 형태로."
"갱신 심사요?"
"등록을 일괄 폐지하는 게 아니라, 갱신 심사를 통해 존치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 조합이 심사권을 쥐되, 등록 자체는 남기는 형태로요."
마기정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결국 예외를 남기는 건데."
"남기되, 조합이 관리하는 예외로요." 오경재가 받았다. "갱신 심사권을 조합이 쥐면 언제든 기준을 올려서 사실상 소멸시킬 수 있잖습니까. 형식적으론 존치고 실질적으론 관리죠. 조합도 감시권을 갖고 우리도 '폐지'라는 낙인은 피하고."
마기정이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그걸 지키려 합니까? 0.003%인데."
오경재가 대답 대신 나를 봤다.
내가 대답했다.
"0.003%가 가격을 위협하진 못하지만 가능성을 보존하니까요. 그 가능성이 없으면 다음 번엔 '유일한 길'이 됩니다. 세상이 다시는 다른 걸 상상하지 못하는 세상. 그건 가격보다 비싼 대가예요."
마기정이 나를 오래 봤다.
그리고 말했다.
"…흥미로운 사람이네요. 알겠어요, 그 안건은 재검토해 보죠."
회의가 끝나고 오경재가 따로 불렀다.
"이다솜 씨, 그 제안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제 아버지가 자급등록 농가예요."
"…아, 그래서."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래도예요. 아버지가 없었어도 같은 말을 했을 거예요. 숫자가 그렇게 말하니까. 0.003%는 숫자로는 무의미지만 구조로는 전부니까."
오경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지원단에 계속 계십시오. 다음 협상 때도 필요합니다."
회의가 끝날 때 마기정이 내 화면 쪽을 봤다. 카메라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 '이 사람은 어디서 왔을까'를 재는 시선. 숫자로 맞선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의 호기심.
"이다솜 씨."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급구역에서 왔다고 하셨죠. 그곳의 씨앗은 어떻습니까?"
순수한 질문이었다 — 답을 알면서 묻는 질문일 수도.
"모릅니다." 나는 대답했다. "저는 농부가 아니라서요."
마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끄덕임.
그날 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4조 바꿨어요. 폐지 대신 갱신제로.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방향은 잡았어요.」
답은 새벽에 왔다.
「잘했다. 근데 조심해라. 지키는 싸움은 조용해야 해. 너무 드러내면 조합이 눈치채.」
아버지다운 조언이었다.
지키는 싸움은 조용해야 한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잠들었다.
테이블에서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조합이 원하는 건 무릎이 아니었다 — 헌장에 맞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모양새는 문구로 만들어진다. 문구를 바꾸는 싸움이 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반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