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14 / 25 목차
3부 · 갈등 과정

14화. 걷는 자들

걷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도시가 멀어지는 걸 느꼈다.

출발한 날 아침을 기억한다. 정우가 관제실에서 나를 배웅했고 지하철역까지 같이 걸어준 뒤 역 앞에서 멈췄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길은 지하철이 아니라 걷는 거라고 했을 때, 정우가 작게 말했다 — "팀장님은 늘 뭐가 되든 해오셨잖아요." 아닌데, 그 말이 발을 움직였다.

고속도로는 걸을 수 없어 국도를 택했다. 차는 거의 없었다 — 곡물이 아닌 화물도 인증 문제에 얽혀 움직임이 줄었고 사람들은 애초에 갈 곳이 없었다.

도시를 벗어나는 길에서 본 풍경들은 모두 '멈춤'이었다. 문 닫은 가게, 손님 없는 카페, 세워진 차들, 주유소에서 멍하니 서 있는 직원. 세상이 멈춘 게 아니라 — 움직이는 게 필요 없는 세상이 됐다.

길 위의 풍경은 기묘했다.

휴게소엔 인증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회색 스탠바이. 주차된 것이 아니라 대기 중이라는 표시등이 점멸하는 트럭들. 어떤 트럭의 냉장 유닛은 아직도 돌고 있었다.

운전사가 없는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냉기. 안에 실린 건 뭘까 — 쌀일까 밀가루일까.

서른아홉 날째 아직도 그 안의 것들은 신선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혼자 걷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둘째 날 오후부터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이들 — 도시에서 농촌으로. 쌀이 있는 곳을 향해. 작은 배낭을 멘 사람들, 몇 명은 가족 단위,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부모도 있었다.

젊은 부부를 지나쳤다. 아이를 업은 남자와 유모차를 미는 여자. 유모차엔 짐이 실려 있었다 — 아기가 아니라 물건. 가족이 옮기고 있었다.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이들도 있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유를 물어볼 일도 없었다 — 도시에 두고 온 것이 있는 사람들. 가족, 직장, 혹은 포기하지 못한 무언가.

길 위에서 스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방향이 다 말해줬다. 도시로 가는 사람은 '남은 것'이 있는 사람이고 도시를 떠나는 사람은 '남을 곳'을 찾는 사람이었다.

한 노인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물었다.

"쌀 찾아가나?"

"네. 아버지 만나러요."

"나도요. 아들이 밑에 있어. 도시엔 밥이 없어서 내려가."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옛날엔 도시가 밥이었는데. 지금은 촌이 밥이야. 세상이 거꾸로 갔어."

"거꾸로 간 게 아니라," 나는 대답했다. "원래대로 돌아간 거예요. 밥은 항상 촌에 있었으니까."

셋째 날 저녁 도로 옆 주유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주유소는 문을 닫았다. 기름은 있어도 그 기름을 실을 차가 없었다. 매점에서 남은 걸 주워 먹고 주차장 구석에서 잤다.

잠들기 전 주유소 간판을 봤다. 가격표에는 여전히 리터당 숫자가 적혀 있었다 —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숫자. 기름을 넣을 차가 없으니 가격을 바꿀 이유도 없었다. 가격은 움직이는 것에 의미가 있다. 멈춘 것의 가격은 숫자일 뿐이다.

새벽에 잠이 깨서 주차장을 걸었다.

서 있는 인증 트럭 한 대 앞에서 멈췄다.

차체에 조합 마크. 곡물 전용. 상태 표시: 스탠바이 대기 39일 11시간.

창문을 들여다봤다 — 사람이 탄 흔적은 없었다. 운전석에는 얇은 먼지가 쌓여 있고 대신 계기판에 '적재물 상태: 정상'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곡물은 건강하다. 옮길 수 없을 뿐.

나는 그 트럭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 살아 있는 시스템. 멈춰 있는 목적.

조합이 만든 세상이었다. 곡물은 보관되고 트럭은 대기하고 사람은 걷고 씨앗은 자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완벽한 정지.

넷째 날부터 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루 40km씩 걷는 건 준비된 몸이 아니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고 종아리가 돌이 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도시로 돌아갈 것 같아서.

점심때 마을회관 앞에서 쉬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왔다 — 궁금해서가 아니라 할 게 없어서. 세상이 멈춘 곳에선 지나가는 사람도 소일거리였다. 한 할아버지가 물었다.

"어디 가나."

"정읍요."

"뭐 하러."

"아버지 만나러."

"아버지가 농부여?"

"자급농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필요 없는 답이었다 — 자급농이라는 말이면 이 마을 사람들도 알았다. 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물은 주민들에게 얻어 마셨다. 시골 마을을 지날 때마다 누군가 물을 내줬고 어떤 집은 찬밥도 내줬다. 시골엔 아직 밥이 있었다 — 자급구역이 아니라도 조합 곡물 비축이 마을 단위로 아주 끊긴 건 아니니까.

한 할머니가 밥을 내주며 물었다.

"어디서 걸어오는 거여?"

"서울에서요."

"서울에서? 거기까지 걸어왔어?"

"네."

할머니는 잠시 나를 보다가 밥을 한 술 더 얹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건지."

그날 밤 마을회관 마루에서 잤다. 농촌의 밤은 도시와 달랐다 — 소리가 있었다. 벌레 소리, 개 짖는 소리, 어디선가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소리. 도시의 밤은 무소리가 아니라 '멈춤'이었는데 여기의 밤은 계속 살아 있었다.

누군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걸으면서 만난 사람이 한 말.

"도시가 끝났다고들 하잖아. 근데 끝난 게 도시가 아니라 '도시의 약속'이었던 거야. 도시는 '거기 가면 밥이 있다'는 약속이었지. 그 약속이 깨지면 도시는 그냥 큰 건물일 뿐이야."

밤하늘의 별이 촘촘했다. 도시에서는 본 적 없는 별들.

다섯째 날 오후 전북 경계를 넘었다.

정읍까지 40km.

경계 표지판을 지나며 나는 봉쇄의 한계를 실감했다. 봉쇄는 지도를 잠근 게 아니었다. 곡물을 잠갔다. 그리고 나는 곡물이 아니라서 걸어올 수 있었다.

기계는 사람 발을 못 막는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다만 막을 필요도 없었다. 걷는 사람은 소수였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도시에서 버텼고 버티는 건 조합의 시범에 도움이 됐으니까.

걷는 것은 자유였지만 소수의 자유였다.

저녁 산골 마을의 입구에 들어섰다.

자급구역 표지가 서 있었다 — 「자급등록 구역: 비인가 경작 활동 구역 조합 시찰 수용 의무」. 녹이 슨 철제 표지판.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것.

논.

멈춰있지 않은 논.

녹두렁 사이로 사람이 걷고 있었고 손에 낫을 든 사람이 벼를 베고 있었고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었다.

도시에서 서른아홉 날 동안 본 모든 풍경과 달랐다.

여긴 멈춰있지 않았다.

여긴 싹이 나고 있었다.

나는 마을 입구에 서서 한참을 봤다. 사람이 흙을 건드리는 모습, 벼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멈추지 않은 세계가 펼쳐지는 모습. 도시에서 그토록 보려 했던 걸 여기서 봤다.

냄새가 났다 — 흙과 벼와 퇴비의 냄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맡던 냄새.

나는 마을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