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싹이 트지 않는다
도시 재배 운동은 봉쇄가 만든 가장 슬픈 풍경이었다.
시작은 한 영상이었다. '옥상 쌀농사 도전'이라는 제목의 동영상 — 어느 유튜버가 마트 쌀을 상자 흙에 심는 실험. 조회수가 백만을 넘자 모방이 시작됐다.
그 유튜버는 자막을 달았다 — 「3주면 쌀이 나온다」. 그 말을 믿은 수십만 명이 각자의 베란다에 상자를 놓았다. 3주를 기다릴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지만 3주가 걸리는 일이라도 해야 했으니까.
일주일 만에 도시의 베란다 수십만 개에 상자가 놓였다.
화분용 흙이 마트에서 품절됐다. 소담의 교환소 바꿈값 판에도 '화분 흙' 항목이 생겼다. 사람들은 공원의 흙을 퍼 오기도 했고 화단을 깠다. 도시의 흙이라는 흙이 전부 상자로 옮겨졌다.
흙이 비싸지자 흙 사기도 생겼다. 빈 상자만 사서 흙은 나눠 파는 사람 공원에서 흙을 퍼다 파는 사람 — 봉쇄 시대의 작은 상인들. 소담은 그 바꿈값을 올렸다.
대단한 장면이었다 — 다들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은.
나도 했다.
소담의 교환소에서 화분 흙 10kg을 노트북과 바꿔 와서, 관제센터 옥상에 상자를 나란히 놓았다. 마트에서 산 배급 쌀을 세 줌, 골고루 뿌렸다.
정우가 옆에서 봤다.
"팀장님도 심어요?"
"62일 때도 심었어. 그때도 안 텄고."
"그런데 왜요?"
"확인하려고."
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접합 유전자 발아 억제 단백, 인증 발아제 없이는 죽은 씨앗. 논리적으로는 다 아는데 그래도 손으로 흙을 만져보고 싶었다.
안다는 것과 확인하는 것은 다르니까.
정우가 상자 옆에 메모지를 붙였다 — 「심은 날: 봉쇄 35일」. 언제 심었는지 기록하는 게 이 작은 실험의 규칙이 됐다.
일주일 뒤 상자는 조용했다.
싹은 없었다. 흙은 흙대로 씨앗은 씨앗대로 — 서로 스쳐 지나가기만 한 채.
정우가 매일 아침 상자를 들여다보다가 나중엔 안 봤다.
4일째, 정우가 말했다.
"팀장님, 혹시 물이 문제일까요?"
"물은 충분히 줬어."
"그럼 햇빛?"
"베란다라 햇빛은 모자라." 나는 상자를 봤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닐 거야."
7일째 아침, 정우는 상자를 보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상자를 보지 않는 건 포기가 아니라,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 거였다 — 봐도 안 트는 상자를 아는 사람의 태도.
뉴스에도 같은 장면이 넘쳤다. 전국의 옥상과 베란다, 학교 운동장 한 켠의 실습 화단 — 사람들이 심은 수십만 개의 상자에서 싹은 한 대도 나지 않았다.
댓글이 달렸다.
「물을 더 줘야 하는 거 아니야?」
「햇빛이 부족한 거 아냐?」
「흙이 문제야, 저런 배양토는…」
그리고 한 줄의 답이 모든 걸 정리했다.
「그 씨앗은 자랄 수 없는 씨앗이야. 너희가 산 쌀은 '심는 쌀'이 아니라 '먹는 쌀'이거든. 발아 억제 유전자가 들어 있어. 조합이 팔 때 이미 그런 설계로 만든 거야.」
댓글창 아래로는 반박이 이어졌다 — '그럼 왜 팔아?', '이게 합법이야?', '식용만 되는 씨앗을 파는 게 돼?' — 질문은 옳았지만 늦었다. 조합은 그 질문에 답할 의무가 없었으니까.
한 댓글이 올라왔다.
「우리가 산 건 쌀이 아니라 '쌀의 사용권'이었어. 종자는 그들 거야. 우린 먹을 권리만 산 거고 기를 권리는 안 산 거지.」
그 댓글이 정답이었다. 우리가 30년 동안 '쌀을 산다'고 생각한 건 사실은 '쌀을 렌탈한다'는 거였다.
며칠 뒤 소담의 교환소 앞 골목에서 장면 하나를 봤다.
어머니와 아이 — 일곱 살쯤 돼 보이는 — 가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이가 물었다.
"엄마, 씨앗이 왜 안 자라요?"
어머니가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아이가 다시 물었다.
"씨앗은 원래 자라는 거 아니에요? 학교에서 배웠어요. 흙에 심으면 싹이 난대요."
어머니는 잠시 말을 찾다가 대답했다.
"이 씨앗은… 안 자라는 씨앗이래."
"왜요?"
"…만든 사람이 그렇게 만들었대."
아이는 상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자라는 씨앗은 어디 있어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골목 모퉁이에서 그 장면을 보고 오래 못 움직였다.
자라는 씨앗은 어디 있어요.
일곱 살짜리가 던진 질문이 이 세상의 핵심 질문이었다.
기술적인 설명은 단순했다.
접합 유전자 — 조합 라이선스 종자에는 발아 억제 단백을 만드는 유전 회로가 심어져 있었다. 씨앗이 흙의 수분을 감지하면 억제 단백이 활성화돼 배의 성장을 정지시킨다. 인증 발아제에 들어 있는 활성 신호가 그 회로를 해제한다.
쉽게 말해 씨앗에 자물쇠가 달려 있고 열쇠는 조합이 판다.
인증 발아제는 동네에서도 팔았다 — 조합 채널을 통해. 그런데 그것마저 비상령으로 '유통 제한 품목'이 됐다. 발아제를 사려면 인증 경로가 필요하고 인증 경로는 지금 잠겨 있다. 씨앗을 살 수도 싹트게 할 수도 없는 세상.
소담이 한마디 했다.
"씨앗이 안 트는 세상에서 싹을 사려는 게 사람이야. 그게 봉쇄의 정답이지 — 희망은 남겨두고 그 희망을 무력화하는 것."
학교에서 배우는 '씨앗은 자라는 것'이라는 문장은 이 세상에서 조건부 문장이었다.
'인증 발아제를 맞으면 씨앗은 자란다.'
그 조건 하나가 모든 것의 차이였다.
그날 저녁 나는 관제센터 옥상의 상자를 다시 봤다.
싹이 없는 흙.
62일 때도 똑같은 상자를 봤다. 그때 나는 몰랐다. 이번엔 안다. 알면서도 심었다 — 확인하려고 아니 어쩌면 혹시나 해서.
혹시나 이번엔 다를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상자를 뒤집어 흙을 돌려줬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씨앗이 안 자라는 세상에서 저항은 뿌리가 없다.
저항은 싹이었다. 대안은 뿌리였다. 뿌리가 없으면 가시는 며칠 못 간다.
그래서 조합은 기다린다.
싹이 없는 세상에서 모든 저항은 언젠가 스스로 마른다는 걸 그들이 제일 잘 알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아버지의 메시지를 다시 들었다.
「여기는 밥이 있다. 대신 싹이 난다.」
싹이 난다.
이 도시에서 싹이 나는 곳이 있다고 아버지는 말하고 있었다.
자라는 씨앗이 있는 곳.
그날 밤 나는 창가에 앉아 도시를 봤다. 수십만 개의 베란다에 상자가 놓인 도시 —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이 뭔가를 할 수 없는 세계.
아버지는 저곳에 있다. 씨앗이 자라는 곳에.
나는 그날 밤 오래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하나를 결심했다.
이 상자를 버리지 말자. 싹이 안 트는 상자라도 심어본 흔적을 지우지 말자. 이 세계에서 '싹이 안 트는 것'을 확인한 사람은 '싹이 트는 곳'을 볼 자격이 있다.
상자를 정리하다가 한 가지가 떠올랐다 — 심은 씨앗 몇 알이 흙 속에 남아 있었다. 죽은 씨앗. 죽었지만 씨앗이었던 것들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