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9 / 25 목차
2부 · 배경 이야기

9화. 검은이삭의 밤

그날 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검은이삭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나온 건 저녁 8시 56분의 첫 보도였다. 지역 뉴스 속보로 시작해 30분 안에 전 채널이 같은 화면을 내보냈다.

곰팡이성 오염.

곡물에 붙는 붉은 곰팡이 — 그걸 먹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식중독 증세를 보인다는 초기 보도. 병원에 실려 간 환자 수, 사망 의심 사례, 그리고 원인 추적.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비인가 곡물이었다.

'공인 검사 절차를 거치지 않은 곡물' — 쉽게 말해 자급농 곡물, 흑시장 곡물, 인증 밖 경로로 유통된 곡물. 보도는 잔혹할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오염 샘플이 발견된 유통 채널, 비인가 창고의 사진, 그리고 '인증만이 답'이라는 전문가 인터뷰.

나는 그걸 관제센터 모니터로 봤다.

당직은 나와 정우, 그리고 콜센터 대기 요원 두 명이었다. 밤의 관제실은 늘 조용하다 — 움직이는 차가 많아야 일이 많은 곳인데 멈춰 있는 차는 울리지 않으니까.

첫 보도가 뜨자마자 정우가 말했다.

"팀장님, 이거 뭐예요."

"보도 보지 말고 로그 봐."

나는 그때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속보가 나오기 전에 우리 단말 쪽에서 먼저 뭔가가 움직인 것 같았다 — 확인할 새 없이 다음 소식이 밀려들었다.

야간 당직이었던 그날 밤의 기억은 지금도 숫자로 남아 있다.

20:56, 첫 보도.

21:40, 식품안전 비상 선언 발표.

22:05, '인증 유통레일 일원화' 조항 공포.

22:47, 전국 인증 곡물 수송 차량 4만 2천 대 스탠바이.

4만 2천 대가 동시에 멈췄다.

22:47 이전엔 우리가 관제하는 차량들이 전국을 촘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속도로에선 야간 운송, 도시에선 새벽 배송 준비 — 42,000개의 점이 한밤의 숨결처럼 천천히 빛났다.

그리고 22:47:00이 됐다.

모니터 벽에서 초록 점이 회색으로 바뀌는 걸 봤다. 파도처럼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 아니, 파도가 아니라 한 번에. 4만 2천 개의 점이 같은 1초 사이에 잠들었다.

관제실이 조용해진 게 아니라 관제실이 고요해졌다. 차는 아직 서 있었지만 — 운전자는 내리지 않았고 문은 열리지 않았고 엔진은 꺼지지 않았다. 단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 기다리는 차들.

정우가 화면을 두 번 쳐다봤다.

"이게… 전부 멈춘 거예요?"

"응."

"왜요?"

"몰라." 그때 나는 몰랐다. 명령이 내려온 줄만 알았지, 명령이 언제 '준비'됐는지는 몰랐으니까.

그날 밤의 다른 쪽 — 아버지의 시간선.

자급구역에는 라디오가 있었다. 스마트폰이 먹히지 않는 산골이라 아버지는 옛날 방식으로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들려준 그날 밤 이야기.

"라디오에서 검은이삭이라고 하더라. 곰팡이 냄새가 나는 보도였어. 아니, 곰팡이 냄새가 나는 이름이었지."

"무슨 뜻이야?"

"붉은곰팡이는 말이야, 쌀에 잘 안 붙어. 곡물 창고에도 잘 안 붙고. 붙는 건 주로 옥수수나 밀이야, 그것도 습기 찬 데서. 보도가 '쌀'을 지목하는 순간, 나는 알았어."

"뭘?"

"누가 씨앗이랑 흙을 모르고 쓴 보도구나."

아버지는 밭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그날 밤 뭔가가 시작된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보도가 '쌀'을 지목한 순간부터 그 보도는 농사 짓는 사람의 귀에는 다른 얘기가 됐다. 쌀 보도인데 쌀 얘기가 아니라 — 쌀을 핑계로 쓴 다른 얘기.

아버지는 그날 밤 창고에 나가 장독대를 봤다고 했다. 씨앗 병이 묻힌 곳. 병은 그대로 있었다 —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병.

그리고 이튿날 자급구역으로 온 통지서 한 장.

「식품안전 비상 조치에 따라, 자급등록 구역 내 곡물 외부 반출을 전면 금지한다.」

자급농 곡물은 원래 판매 금지였다. 반출 금지는 무의미한 문장 같았지만 아버지는 알았다.

판매가 아니라 '반출'이었다.

마을 안에서 마을 밖으로 씨앗이 나가는 것도 포함되는 단어였다.

그날 밤 나는 모니터 앞에서 이해하려 했다.

곰팡이가 나왔다 → 오염원을 차단한다 → 비인가 곡물이 위험하다 → 인증만 통과한 곡물만 유통한다 → 인증 유통을 일원화한다.

논리적으로 보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인증 일원화가 되자마자 인증 차량이 전부 멈췄다.

오염을 막겠다며 레일을 하나로 모은 뒤 그 레일 위의 차를 전부 세웠다. 안전을 이유로 통로를 좁혀놓고 좁힌 통로를 잠갔다.

밤새 콜센터가 마비됐다.

화주들이 전화했다 — '우리 쌀이 어디 있냐', '왜 멈췄냐', '언제 풀리냐'. 정우와 나는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확인 중입니다', '지침 대기 중입니다', '비상 조치입니다'. 우리가 무슨 답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도 화면을 보며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한 화주가 소리쳤다.

「내 쌀이 경부 고속도로 위에 있어요. 트럭이 멈췄다고요 — 고속도로 한가운데서요!」

「멈춘 게 아니라 대기 중입니다.」

「대기가 뭔데요! 차가 멈춘 거잖아요!」

대답할 수 없었다. 차는 멈추지 않았다 — 인증 명령이 '대기'를 내렸다. 멈춤은 물리적 상태고 대기는 논리적 상태. 밤새 우리는 그 차이를 수백 번 설명했다.

오염 때문에 곡물이 못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곡물이 못 움직이는 상태에서 오염이 그 이유로 제시됐다.

나는 그날 밤 관제 데이터를 다시 돌려봤다.

차량 4만 2천 대의 스탠바이 명령 수신 로그. 발신 시각 전파 경로 단말 응답.

전부 같은 시각에 내려갔다. 지역도 없이 순서도 없이 — 설계된 정지였다.

당직이 끝날 무렵 정우가 문득 물었다.

"팀장님, 근데 이게… 언제 다시 움직여요?"

"몰라."

"시켜야 할 것 같은데."

정우의 말이 옳았다. 누군가는 이걸 다시 움직여야 했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를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 그리고 그게 답이었다.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만이 해제를 내릴 수 있다는 너무나 간단한 구조.

그때는 몰랐다.

명령이 언제 '준비'됐는지를.

발신 시각만 봤지, 명령이 작성된 시각은 안 봤으니까.

명령이 작성돼 큐에 올라간 시각이 첫 보도보다 빨랐다는 걸 나중에 문혜성이 보여주고 나서야 알았다.

4분.

보도가 세상에 나오기 4분 전에 멈출 준비가 돼 있었다.

4분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그렇다 — 계획된 정지는 준비 시간이 있다. 사고는 준비가 없고 계획은 준비가 있다. 이건 계획이었다.

그날 밤을 정리하면 이렇다.

세상은 오염을 봤다.

나는 정지를 봤다.

아버지는 씨앗을 봤다.

그리고 조합은 우리 셋이 각각 다른 것을 보는 동안 아무 요구도 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범의 첫날 밤이었다.

그 밤을 끝으로 우리 세계는 두 개로 나뉘었다 — 쌀이 있는 곳과 쌀이 없는 곳.

그리고 둘 사이를 잇던 다리는 다시는 놓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 5시의 서울 — 도시는 여전히 도시였는데 무엇이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곡물 수송 트럭이 지나가지 않는 아침. 그날의 서울은 소리가 달랐다 — 도시의 아침은 유통의 소리로 시작되는데 그 소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