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8 / 25 목차
2부 · 배경 이야기

8화. 62일

62일 보이콧은 쌀값이 열두 번째로 오르던 해에 시작됐다.

나는 스물여섯이었고 짐짝의 주임이었고 그해 광장에 나간 수십만 명 중 하나였다.

처음엔 다들 웃었다.

조합이 가격을 또 올리자 시민단체가 선언했다. '조합 불매 보이콧'. 조합 브랜드 곡물을 사지 말자는 운동. SNS에 해시태그가 번졌고 유명인들이 참여했고 슈퍼마켓에서 조합 제품 진열을 거부하는 매장이 생겼다.

재밌었다. 처음 2주는.

첫 주말에 나는 광장에 나갔다. 수십만 명이 깃발을 들었다 — '쌀값을 돌려줘', '식량은 권리다', '조합은 가격의 폭군'. 구호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땐 다 믿었다. 사는 사람이 장의 주인이라는 옛말을 아직 다들 믿고 있었다.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양했다. 대학생, 직장인, 주부, 은퇴자 — 공통점은 하나, '쌀이 비싸'라는 불평을 공유한다는 것. 불평이 모이면 세상이 움직이는 줄 알았다.

보이콧 선언문이 붙은 슈퍼마켓에선 사람들이 진열을 보고 박수를 쳤다. 자발적인 거부는 보기만 해도 좋았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2주를 갔다.

두 번째 주말의 광장은 첫째 주보다 작았다. 사람이 줄어든 게 아니라 구호가 줄어들었다 — 외치는 에너지가 첫 주의 흥분에서 두 번째 주의 의무감으로 바뀐 것.

2주째에 조직이 생겼다.

보이콧 위원회가 구성됐고 각 지역별 담당자가 정해졌고 '조합 대안 가이드'라는 문서가 돌았다 — 어디서 비조합 곡물을 살 수 있는지, 어떤 매장이 조합 진열을 거부하는지. 소비자의 힘을 조직하려는 시도.

조직이 생기자 믿음이 커졌다 — '이번엔 다를 수 있다'는 공기. 62일 보이콧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까지 10년이 걸렸는데 그 10년이 '다시는 모이지 말자'는 기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다시 모였다.

3주째에 문제가 생겼다.

조합 곡물을 안 사면 뭘 사야 하는가.

비조합 곡물은 존재했다. 소규모 자급국, 잔여 독립농가 그리고 배양 단백질 같은 대체 식량. 그런데 양이 안 됐다.

보이콧 참여자가 하루하루 늘수록 비조합 곡물의 가격이 폭등했다. 대안을 사려는 사람이 대안의 양을 넘어섰다.

바다 건너 쌀 가격이 일주일 사이 세 배로 뛰었다. 지금 생각하면 간단한 산수였다 — 찾는 사람은 늘고 나오는 양은 같으면 가격은 오른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보이콧의 배신'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안 산다는데 남는 걸 사려는 사람들이 남는 값을 올렸다.

나도 바다 건너 쌀을 사려다 말았다 — 가격이 너무 올라서.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살 수 없으면 나는 보이콧에 참여할 수 없었다. 참여하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었다.

이게 첫 번째 벽이었다. 대안이 있어도 대안이 대안일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4주째, 도시농장 운동이 일었다.

"우리가 직접 기르자."

옥상 텃밭, 커뮤니티 가든, 발코니 쌀농사 — 사람들이 흙을 샀다. 나도 샀다. 집 베란다에 상자를 놓고 흙을 채우고 마트에서 산 쌀을 심었다.

싹이 트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못 심은 줄 알았다. 물을 더 줬고 햇빛을 맞췄고 영양제를 뿌렸다. 그래도 안 텄다.

아파트 게시판엔 비슷한 글이 올라왔다. '내 쌀도 안 튼다', '우리도', '발아율 0%'. 누군가는 씨앗 문제를 의심했다 — 다 같은 실패니까. 누군가는 흙 문제를 의심했다 — 똑같은 화분인데.

그리고 나서 알았다.

마트 쌀은 접합 유전자 종자다. 발아 억제 단백이 활성화된 씨앗 — 인증 발아제를 맞지 않으면 영원히 죽은 씨앗이다.

우리가 산 쌀은 '심을 수 없는 쌀'이었다.

구독을 안 사면 싹도 없다.

그날 수만 개의 베란다에서 같은 깨달음이 일어났다. 아침에 상자를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전부 같은 얼굴로 상자를 내려다봤다.

씨앗이 씨앗이 아니었다. 심을 수 있는 권한의 증표였다. 싹이 안 트는 건 씨가 아니라 우리가 '심을 자격'을 못 샀기 때문이었다.

5주째, 배양 단백질이 화제가 됐다.

"곡물 없이도 단백질은 만들 수 있다!"

배양 탱크에서 자란 단백질 — 실제로 맛도 괜찮았고 영양도 됐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국가의 배양 시설 전체를 풀가동해도 국민이 먹어야 할 단백질의 한 자릿수를 겨우 덮었다. 탱크를 지으려면 몇 년이 걸리고 설비를 돌리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도 값이 올랐다.

우리는 할 수 있었다. 다만 충분히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다는 것과 충분하다는 것 사이의 거리가 그해 광장에서 사람들이 배운 것이었다.

6주째, 해외 자급국이 바깥길을 잠갔다.

조합 곡물을 안 쓰던 소수 국가들 — 인구가 적고 농지가 넓고 아직 자급 자족이 되는 나라들. 그들이 보이콧 바람을 노리고 바깥길에 빗장을 걸었다.

"우리 백성 먼저."

당연한 얘기였다. 남의 굶주림 앞에서 어느 나라가 너그럽겠나.

마지막 대안마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보이콧은 무너졌다. 배신당한 게 아니라 수학에 졌다 — 대안이 없는 저항은 자기 몸의 시계를 견뎌야 했는데 우리의 시계는 먹는 쪽보다 빨랐다.

62일째 되는 날 보이콧은 끝났다.

공식 해산 선언도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하나둘 마트에 다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조합 곡물 진열 앞에. 고개를 숙인 채로.

나는 그날 마트에 갔다. 보이콧을 지키려던 사람들이 진열대 앞에 선 모습을 봤다 — 다들 고개를 숙인 채로. 서로를 보지 않으려 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서로를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아무도 항복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다들 배고픔이 이겼다.

보이콧 위원회가 낸 마지막 성명이 기억난다.

「우리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대안이 없는 저항은 기간의 문제였습니다.」

62일.

돈이 왕이던 세상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 사는 사람이 사는 것으로 싸우려다, 살 '것'이 상대 손에 있던 싸움. 세상이 '저항'의 유통기한을 배운 기간이었다.

그 뒤로 생긴 말버릇이 이거다.

'저항해 봤자.'

해산하던 날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오랜만에 통화한 아버지는 내가 광장에 나갔던 걸 알고 있었다. 묻지도 않고 먼저 말했다.

"다솜아."

"응."

"대항은 대안이 있어야 한다."

"……대안이 뭔데."

"씨앗이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씨앗이 없으면 대항도 없어. 심어서 자라는 게 없으면 싸움은 시간 문제일 뿐이야. 그리고 시간은 먹고사는 쪽 편이지."

전화를 끊고 나는 오래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십 년 전에 우리가 광장에서 배운 걸 — 씨앗 없는 저항은 날짜만 있는 저항이라는 걸.

그리고 장독대 아래 병 하나를 묻어둔 사람의 말은 그래서 무거웠다.

62일 보이콧이 끝난 뒤로 세상은 조용해졌다.

가격은 계속 올랐고 몫은 계속 줄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모이지 않았다. '저항해 봤자'가 말버릇이 된 건 그때부터다 — 실패가 희망을 지우는 속도는 실패가 시작된 속도보다 빨랐다.

나는 그해 스물여섯의 내가 지금의 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서른다섯인 나는 그때보다 더 많은 걸 알고 더 적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