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공짜 끼니의 시대
내가 열세 살이던 해 동네에서 마지막으로 농사를 짓던 김 할아버지가 죽었다.
그 할아버지가 죽으면서 우리 마을에서 '모내기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 한 명만 남았다.
아버지가 그때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나라에서 농부가 사라지는 중이다. 우리가 마지막 세대야. 아니, 마지막 반 세대야."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농부가 사라진다는 게 뭔지, 아이였던 나는 몰랐다.
장례식 날 아버지가 김 할아버지의 논에 갔다. 논 주인이 없어진 뒤라 풀이 무성했다. 아버지는 그 논 가장자리를 손으로 맨손으로 쓸면서 말했다.
"이제 이 논은 무엇이 되려나."
산 사람이 떠난 자리에 뭔가가 와야 한다. 빈 땅은 아무도 지키지 않으니까.
통계로 보면 간단했다.
1940년대생, 50년대생, 60년대생 — 씨앗을 고르고 모를 내고 김을 매고 벼를 베던 세대. 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농사'라는 행위가 인류의 기술 목록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조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읽은 오래된 통계 기사 — 어느 나라는 곡물 자급률이 이미 20% 언저리였고 밀이나 옥수수는 사실상 전량 바다 건너 것이었으며 농가 평균연령은 예순을 훌쩍 넘어 있었다. 그때는 그 숫자가 경고인 줄 몰랐다. '먹을 게 있으니까 괜찮다'는 시대의 안일함.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 그 나라는 스스로 먹을 수 없는 나라가 이미 돼 있었다.
한 세대가 죽으면서 일어난 건 '일손 부족'이 아니었다. '지식의 소멸'이었다.
모내기는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옆에서 보며 배우는 거였다 — 모내기선, 깊이 물꼬 관리, 풀 서는 시기. 사람이 죽으면 그 지식은 죽는다. 배우는 사람이 없으면 지식은 스스로 멸종한다.
배우지 않은 기술은 죽는다.
가르칠 사람이 없는 기술은 더 빨리 죽는다.
아버지 세대가 마지막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우리 세대는 배우지 않은 첫 세대였다.
빈자리는 기다리지 않았다.
로봇 회사들이 왔다.
처음엔 '영농 지원 로봇'이라는 이름이었다. 이앙기 보조, 방제 드론, 수확기 자율주행 — 늙은 농부의 무릎을 대신하는 기계들. 농촌은 환영했다. 아버지도 환영했다. 마흔 넘은 아버지의 허리는 기계가 아팠다.
다음엔 '위탁 경작'이 왔다. 농지는 농민이 소유하되, 경작 전 과정을 회사에 맡기는 계약. 노인들은 팔았다. 손목 아픈 농사 대신, 매달 들어오는 위탁료.
'위탁'은 교활한 계약이었다. 농민이 죽을 때까지 농지 소유는 농민에게 남기는 대신, 그 농지에서 나오는 곡물은 전량 회사가 가져갔다. 농민은 땅 주인인데 자기 땅에서 난 것을 먹지 못하는 구조였다. 위탁료가 곡물값보다 높으니 합리적 선택이었고 합리적 선택이 인류의 농사 기술을 멸종시켰다.
그다음엔 '인수'였다. 농민이 죽은 뒤의 농지는 조합 명의로 넘어갔다. 법적으로 '협동조합' 형태를 취한 회사들이 — 농지 소유는 조합 자격이 필요했으니까 — 그 껍데기를 쓰고 농지를 모았다.
껍데기는 협동조합, 알맹이는 회사.
나중에 사람들이 그걸 그냥 '조합'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다.
조합의 밸브가 완성된 건 기술이 그걸 이미 증명했기 때문이다.
몇 세대 전의 일이다. 사람 없이 모내는 기계가 흔해지고 기계를 '산' 농민이 그 기계를 '고칠 권리'는 갖지 못하는 계약들이 당연해진 시절이 있었다. 기계는 농민의 것인데 그 안의 허락은 회사의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선례가 하나 있었다.
어느 전쟁에서 약탈된 농기계 수십 대가 적국의 손에 넘어갔다 — 회사는 그 기계들을 원격으로 '비활성화'했다. 약탈자들이 들고 간 건 달릴 수 없는 쇳덩어리였다.
그때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정의로운 원격이었으니까.
아무도 생각 안 했다. 같은 스위치가 누구에게도 돌아갈 수 있다는 걸.
황금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로봇은 사람보다 셌다. 한 대의 수확기가 마흔 명분을 했고 드론은 밤에도 방제를 했고 콜드체인은 상할 틈을 안 줬다.
그리고 회사들은 남는 돈을 안 가졌다.
정확히는 남는 돈을 '안 챙기는 척'했다. 기르고 거두는 데 든 값에 가까운 가격으로 곡물을 내놓았다. 쌀 한 가마의 가격이 내 어린 시절 점심값보다 쌌다.
전략이었다 — 나중에 밝혀진 전략이지만 그때는 상식으로 보였다. 농촌 인구가 사라진 뒤에 뭘 심고 뭘 먹을지 결정해야 하는 세상에서 '돈 안 들이고 밥 주는 주체'는 당연히 환영받았다. 조합은 싼 곡물로 농민 대안을 몰아내고 식탁을 독차지해 대체재를 없앴다.
싼 것에는 대가가 있다. 그 대가가 우리가 모르는 값으로 나중에 청구됐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세상은 환호했다.
재료가 싸니 모든 손이 배불렀다. 제빵사, 제면사, 맥주 양조사 — 곡물을 받는 모든 손이 배불렀다.
위에 얹힌 일들은 더 배불렀다. 나르는 일, 배달, 외식, 식품 리뷰 콘텐츠, 맛집 지도 — 먹을 것이 싼 세상에서 먹는 행위를 둘러싼 모든 손이 피었다.
'공짜에 가까운 끼니'의 시대.
인류 역사에서 먹는 문제가 이렇게 작아진 적은 없었다.
세상의 문화도 그걸 반영했다. 먹방 콘텐츠가 폭발했고 음식 리뷰가 전성기를 누렸고 '음식은 찍는 것'이라는 농담이 통했다. 잔반은 버려졌다 — 남기는 게 예의가 아니라 당연한 시대. 누군가가 "음식을 아끼세요"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싸니까 아끼지 않는 게 합리였던 시대.
조합은 그 시대를 만들었고 그 시대가 만든 허세를 나중에 거둬갔다.
아버지는 그 시절 나를 도시로 보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물류 회사에 취직했고 아버지는 남았다.
역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
"밭은 이제 사람 자리가 아니야. 기계 자리지. 너는 사람 자리로 가."
"아버지는 왜 남는데."
"나는 자급등록 농가야. 법적으로 남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고."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남아야 해. 누가 이 땅을 기억해야 하니까."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기억'이라는 단어를 아버지는 정확히 쓰는 사람이었다. 땅은 기억이 필요하고 씨앗은 기억이 필요하고 그 기억을 지닌 사람이 하나라도 남아야 한다는 걸 아버지는 알았다.
역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봤다. 논마다 기계가 서 있었다 — 사람이 아니라 기계. 모내는 기계, 베는 기계, 나르는 기계. 사람은 그걸 '보는' 사람이었다.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라 농사를 구경하는 사람.
그게 내 세대가 본 마지막 풍경이었다.
자급등록이라는 제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그때는 몰랐다.
농민이 사라지던 전환기에 정부와 조합이 만든 예외 조항 — '생활 문화재' 같은 것. 조합 곡물을 안 사는 대신 자기 땅에서 자기 소비분만 경작할 수 있는 등록 농가. 판매는 금지, 규모는 제한, 조합 '시찰' 수용이 조건.
전 세계에 수백 명.
아버지는 그 수백 명 중 하나였다.
돌아보면 황금기에는 균열이 있었다.
쌀이 쌀수록, 농지는 회사 손으로 넘어갔다. 종자는 한 종류씩 특허가 붙었다. 밭에 심는 씨는 전부 조합의 것이 됐다 — 아니, 씨는 '구매'하는 게 아니라 '구독'하는 게 됐다.
구독 씨앗의 기술도 사실 새 발명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심어도 다음 세대가 발아하지 않는 종자의 특허가 존재했다. 씨앗의 손자를 미리 죽여두는 기술. 세상은 그걸 '죽은 씨앗'이라고 불렀고 회사들은 '상용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기술을 지우지 않았다. 기술은 서랍에 있었다 — 손을 바꿔 오기만 하면 되는 특허 문서로.
그때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밥이 쌌으니까.
사람은 배부르면 계약서를 안 읽는다.
우리는 다 배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