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9일치의 진실
봉쇄 33일째 되던 날 내 계산표의 숫자가 한 자릿수로 내려앉았다.
실질 동원 가능 재고 9일치.
'있는 쌀'이 아니라 '올 수 있는 쌀'이 9일치라는 뜻이다.
계산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국내 곡물을 먹는 양 바다 건너 밥의 비중 재고 배분 방식 — 3주 동안 같은 숫자를 다른 방식으로 돌려봤다. 결과는 매번 비슷했다.
전략 비축은 있으나 동원이 안 되고 창고 재고는 있으나 길이 안 열리고 상에 오르는 길은 죽었으나 상 위에서 먹는 일은 계속된다.
9일. 그 다음부터는 계산이 아니라 다른 얘기가 되는 숫자였다.
군 비축미는 따로 있었다. 국가가 전시를 대비해 비축하는 물량 — 그것까지 합치면 공식 수치는 훨씬 넉넉했다.
문제는 그 쌀도 '움직일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
군 차량은 사람이 운전한다. 인증 레일과 무관하다. 군이 직접 나르면 된다는 논리는 완벽해 보인다.
한 가지 빼고.
군 수송량은 하루 몇천 톤이 한계다. 이 나라가 하루에 먹는 곡물은 그것의 몇 배다. 군 수송이 상에 나가는 물량의 몇 분의 1도 못 채우는 건 수학의 문제지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
비상령은 '비인가 곡물 수송'을 금지하는데 군 차량이 곡물을 실으면 법적으로 '군사 수송'이 되는가 '곡물 수송'이 되는가 조합 인증 위원회가 그걸 인정해주는가의 문제였다.
인정 안 해주면 군 트럭도 '비인가 수송'이다.
압수 대상.
국가의 트럭을 누가 압수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다들 말이 없었다. 압수 주체는 법집행이 아니라 '인증'이었다. 인증은 조합의 영토였다.
군용 트럭으로 쌀을 옮기는 건 기술적으로 가능했다. 다만 그 쌀이 '인증된 쌀'이 아니면 옮기는 순간 불법이 되는 세상이었다.
아침 회의에서 오경재 본부장의 브리핑을 봤다.
식량비상대책본부장 — 군인 출신의 관료 매일 같은 시간 같은 표정으로 국민에게 숫자를 읽어주는 사람.
오늘의 발표:
「각국 정부와 공조하여, 조합연합에 공급 재개를 공식 요청하였습니다. 조합 측은 식품안전 절차가 진행 중임을 재확인하였으며—」
화면 아래 자막이 스쳤다.
「조합연합 답변: '식품안전이 확인되는 대로 공급을 재개한다.'」
다섯 번째 같은 문장.
정우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 진짜 똑같은 말만 해요."
"맞아.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게 메시지야."
"무슨 뜻이요?"
"우리가 뭘 해도 답이 안 바뀐다는 뜻이야. 요청을 해도 압박을 해도 조건도 없이 한 줄. 기다리라는 거지. 기다리는 게 시범이니까."
정우가 작게 물었다.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해요?"
나는 대답을 못 했다.
그게 이 상황의 정답이었다. 뭘 해도 뭘 안 해도 조합의 답은 같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간다. 시범은 성공하고 있다 —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방식으로.
뉴스 자막이 계속 돌았다. 어느 나라는 국가비상사태를 어느 나라는 배급제를 어느 나라는 '조합과의 개별 협의'를 발표했다. 전부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들.
세계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 '요구가 없는 봉쇄에는 어떻게 답하나.'
점심시간 도시의 풍경을 걸었다.
마트 앞의 줄은 여전했다 — 한 달째 같은 형태 같은 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선. 은행은 열려 있었다. 영화관은 상영했고 학교는 수업했고 병원은 진료했다.
전부 정상인데 하나만 빠져 있었다. 식탁.
거리에 줄 서 있는 노인들을 봤다. 한 무리는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나눠 먹고 있었다 — 저마다 남은 반찬이 달랐다. 누구는 김치, 누구는 멸치, 누구는 계란말이. 세상이 멈춘 것이 아니라, 세상의 '밥상'만 멈춘 모양이었다.
재밌는 건 사람들이었다. 삼 주째 달라진 게 있다 — 표정이. 첫 주엔 '언제 끝나나'의 불안, 둘째 주엔 '괜찮아지겠지'의 기대, 지금은 그냥 '이게 생활'이라는 얼굴.
적응.
인간은 정말 뭐든 적응한다. 굶는 것도 줄 서는 것도 메뉴판을 보는 것만으로 배를 채우는 것도.
그게 조합이 세상에 가르치려는 것이겠지.
'너희는 적응할 수 있다. 우리 가격에 적응할 수 있다.'
9일치라는 숫자는 보고서로 올라갔다.
오경재 본부장의 호출이 왔다 — 비상대책본부 차원의 브리핑.
본부장은 군인 출신다운 말투로 물었다.
"9일 이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계산 불가능해집니다. 재고가 소진되면 배급제가 되고 배급제가 무너지면…" 나는 말을 멈췄다.
"무너지면 뭡니까?"
"식량 약탈과 인구 이동이 시작될 겁니다. 예측은 할 수 있지만 예측할 필요가 없어지는 지점이에요."
본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국가가 굶는 걸 보여줄 수 없다는 게 문제야. 보여주는 순간 끝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괜찮다'고 말해야 해.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그 말이 이 도시의 정치였다 — 숫자는 참인데 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숫자.
오후에 올라온 소식 하나.
「시민연대, 토요 집회 예정 인원 3만 명 넘겨 — '식량 주권 회복' 요구」
댓글란을 들여다보니 첫 번째 댓글이 이랬다.
「62일 때도 봤잖아. 뭐가 달라질 건데.」
아래 답글.
「이번엔 다를 수도 있잖아.」
「뭐가?」
답글은 달리지 않았다.
'뭐가 달라질 건데'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안이 없는 저항은 결과를 이미 아는 저항이다.
나도 댓글을 쓰려다가 지웠다.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62일 때 나도 광장에 있었으니까.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희망의 반복'을 겪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플래카드, 같은 구호, 같은 '이번엔 다를 거야'라는 눈빛. 열 번쯤 보고 나면 '이번엔'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줄어든다.
저녁 관제 화면의 회색 점들을 보며 생각했다.
4만 2천 대. 차는 멀쩡하고 쌀은 있고 도로는 열려 있다. 잠긴 건 '인증' 하나다. 종이 한 장, 서명 하나, 합의 하나.
세상의 식탁이 종이 한 장에 멈춰 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쓴 사람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면 우리가 흥정을 시작할 테니까. 요구가 없어야 우리가 먼저 무릎을 꿇으러 온다.
시범은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정우가 다가왔다.
"팀장님, 내일도 출근하세요?"
"나갈 거야. 왜."
"뭐 하시게요."
"준비."
"뭘 준비요?"
"사람 만나러 가는 준비." 나는 관제 화면을 끄며 말했다. "이 얘기를 이해하려면 이 얘기를 만든 사람들을 봐야 하니까."
자정이 가까울 때 나는 결심했다.
이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먼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쌀이 공짜에 가깝던 시절로.
아버지가 나를 도시로 보낸 시절로.
'저항해 봤자'라는 말이 생기기 전으로.
62일이 뭐였는지, 누가 어떻게 졌는지, 그리고 왜 그 실패가 지금 세상의 뼈대가 됐는지.
이 이야기의 시작은 봉쇄가 아니다.
시작은 우리 모두가 공짜 끼니를 받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