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빈 진열대의 법칙
기계가 굶어가는 방식은 아무도 예상한 것과 달랐다.
공장은 멈추지 않았다. 전기는 들어왔고 라인은 돌았고 근로자는 출근했다.
다만 만들 것이 없었다.
제과공장에는 밀가루가 없었다. 라면 공장에는 스프의 곡물 전분이 없었다. 맥주 공장에는 맥아가 빵집에는 밀가루가 분식집에는 쌀국수가 없었다.
평택의 과자 공장에 다니는 친구가 사진을 보내왔다.
멈춘 라인이 아니라 도는 라인이었다. 컨베이어가 돌고 포장기가 닫혔는데 그 위를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 기계는 준비됐는데 반죽이 안 온다.
"우리 라인은 지금 '대기' 상태야. 전원은 켜져 있고 사람은 자리에 있고 근데 만들 게 없어."
그 문자가 기계들의 실체였다. 멈춘 게 아니라 멈추지 못하는 채로 빈 손을 든 상태.
뿌리가 끊기면 기계는 '돌아가는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계는 '무엇을' 빚을지 스스로 고르지 못하는 물건이 된다.
위에 얹힌 일이 죽어가는 방식은 더 기묘했다.
은행 창구는 열려 있었다. 창구 직원은 친절했고 시스템은 완벽하게 작동했다. 계좌이체는 됐고 잔고 조회도 됐다.
살 수 있는 게 없을 뿐.
보험사는 보험금을 산정했다. 광고사는 광고를 만들었다 — 소비할 게 없는 제품의 광고를. 배달 플랫폼은 배달비를 책정했다 — 배달할 음식이 없는 배달비를. 전부 정상 작동.
내용물이 없는 완벽한 서비스들.
그중 제일 기묘한 건 돈 일을 하는 동네였다. 여의도의 트레이더들은 여전히 차트를 봤다 — 숫자가 움직이니까 일을 해야 했다. 다만 곡물의 내일을 파는 장이 닫힌 뒤로 차트에 '아침값'이라는 항목이 없어졌다. 돈이 회전하는 건 돌아가는데 돈으로 살 것의 목록이 줄어들었다.
돈은 무사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쪼그라든 거다.
한마디로 — 위에 얹힌 일은 밑동이 올린 '것' 위에 앉아 있었고 그 위에만 있었다.
빈 진열대를 처음 본 건 28일째였다.
동네 마트에 갔다 — 미련한 마음으로. 곡물 코너는 비어 있었고 라면 코너는 비어 있었고 통조림 코너만 뼈다귀처럼 몇 개 남아 있었다. 남은 건 조미료와 음료수. 사람들은 진열대 앞을 지나가며 봤다 —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아니라 뭐가 없는지 확인하는 얼굴로.
한 노부부가 쌀 코너 앞에 서 있었다.
"여기 진짜 없어요?"
"없어요. 들어오는 날 아침에 줄 서요."
"줄 서면 살 수 있어요?"
"…다들 생각이 그래서 줄도 길어요."
노부부는 진열대를 한참 보다가 돌아갔다 — 빈손으로.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알았다. 지금 이 도시에서 '쇼핑'은 구매가 아니라 '확인'이었다 — 세상이 정상인지를 확인하는 행위.
우리 회사 '짐짝'의 구조조정이 그날 확정됐다.
배차관제팀 30명 중 24명 무급휴가. 남는 6명은 '비상 관제 요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는 남는 쪽이었다. 잘린 쪽보다 낫다고 말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멈춘 것을 지켜보는 일'이 남은 쪽의 업무였다.
정리 통보를 받은 사람들이 짐을 싸는 걸 봤다. 개인 소품 상자 하나에 8년이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인사팀은 '순환'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모두가 알았다 — 돌아올 자리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걸.
정우도 남았다.
"팀장님,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트럭은 멈췄고 배차할 것도 없는데."
"의미 없어."
"……네?"
"근데 회사는 남아야 하니까. 회사도 먹고사는 법을 아는 생물이야."
정우가 이해 못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설명했다.
"봉쇄가 끝나는 순간, 제일 먼저 움직여야 하는 게 물류야. 쌀이 풀리는 날 관제가 없으면 그 쌀은 제멋대로 흘러가. 그날을 위해 누군가는 회색 점들을 봐야 해. 그게 우리가 '남는' 이유야."
"언제 풀리는데요?"
"몰라."
나는 창밖을 봤다.
"아무도 몰라. 그게 포인트야."
퇴근길에 윤소담을 만났다.
옛 팀 동료 — 두 달 전에 짐짝을 나간 사람. 지금은 재래시장 뒷골목에서 '교환소'를 운영한다는 얘길 들었다.
교환소는 말 그대로 물물교환 중개소였다.
가게 문패도 없이 테이블 하나 놓고 사람들이 가져온 물건을 받아 값을 매기고 필요한 물건과 바꿔주는 곳. 가져가는 몫은 '바뀐 물건의 식량분' — 소담은 그 몫도 쌀로 받았다.
"어, 팀장. 왔어?"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보다시피." 소담이 장부를 넘기며 웃었다. "중개. 원래 하던 일이잖아. 우리가 뭘 했어? 화주랑 차주를 이었잖아. 지금은 라면 가진 사람이랑 쌀 가진 사람을 이어주는 거야. 같은 일이지."
장부를 들여다봤다.
바꿈값 판: 노트북 1대 = 쌀 15kg. 태블릿 = 쌀 8kg. 손목시계(기계식) = 쌀 20kg. 지식재산권 — '협의'. 마지막 항목에 웃겼다.
"지식재산권도 받아?"
"받아. 특허증서 가져온 사람 있었어. 쌀 2kg에 팔더라." 소담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싸던 게 제일 먼저 싸지는 게 이런 때야."
"어제 거래된 거 있어?"
"있어." 소담이 장부를 뒤로 넘겼다. "아침에 할머니가 오셨어. 약통을 들고. 고혈압 약인데 처방전이 안 돼서 못 사시는 거야 — 약국은 열리는데 병원 처방이 안 되니까. 그 약을 쌀 5kg에 중간에서 바꿔드렸어."
"약도 쌀로 바꿔?"
"다 바꿔." 소담이 말했다. "지금 이 도시에서 제일 굳은 돈이 뭔 줄 알아? 쌀이야. 돈도 쌀로 환산해. 카페에서 커피 살 때 쌀 값으로 재는 시대야."
"돈은?"
"돈도 값이 있어. 10만 원권이 쌀 3kg쯤. 돈을 쌀로 바꾸는 값이 매일 달라져. 내가 그걸 매기는 사람이고."
소담의 말이 계속됐다.
"근데 팀장, 재밌는 게 뭔지 알아? 이런 장이 생기는 게 원래 '다 무너질 때' 나타나는 거거든. 근데 지금 사람들 표정이 그렇지 않아. 적응했어. 쌀 없으면 교환하고 교환 안 되면 참아. 인간은 역시 적응력이 대단해."
"그게 걱정이야."
"뭐가?"
"적응하는 게."
나는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조합이 원하는 게 뭘 것 같아? 세상이 굶는 것? 아니야. 세상이 '굶어도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적응하면 다음엔 더 오래 기다려도 되니까. 시범은 한 번으로 안 끝나."
소담의 표정이 처음으로 어두워졌다.
집에 오는 길 대로변 전광판에 공지가 떴다.
「토요일 14시, 시청 광장 — '식량 주권 회복 집회' 주최: 시민연대」
처음 보는 규모의 집회 예고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광판을 봤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또 하나. 저항해 봤자…"
'저항해 봤자' — 62일 보이콧이 남긴 말버릇.
나는 멈춰 서서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시민연대. 가격상한법 발의 운동, 반독점 소송 재개, 조합 불매 서명 — 그런 것들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십 년 전에 실패한 것들.
이번엔 다를까. 아니면 같은 벽에 다시 부딪힐까.
나는 그 질문을 안고 걸었다.
걷다가 생각났다. 소담의 말 — '지금 제일 굳은 돈이 쌀'이라는 말.
돈은 쓸 곳이 있을 때 돈이다. 지금 쌀은 쓸 곳이 가장 확실한 물건이었다 — 먹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쌀이 돈이 됐다. 그리고 그 돈을 찍어내는 곳은 이제 동네 돈집이 아니라 조합이었다.
조합은 돈을 찍는 나라가 됐고 우리는 그 나라의 외화를 사는 사람들이 됐다.
그걸 깨달은 순간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 '식량 주권'. 주권이란 단어가 정확했다. 우리가 잃은 건 쌀이 아니라 주권이었고 돌려받는 방법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그리고 그날 밤 아버지의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는 걸 아침에야 알았다.
잠든 사이에 도착한 파일 — 길이 7초.
「여기는 밥이 있다. 대신 싹이 난다.」
밥이 있다는 건 앞 메시지와 같다.
이번엔 뒤가 달랐다 — '대신 싹이 난다.'
싹이 난다. 무슨 뜻인지는 어렵지 않았다 — 씨앗이 살아 있다는 뜻. 아버지는 죽은 씨앗의 세상에서 싹이 트는 종자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신' — 교환의 말이었다. 너의 도시에는 쌀이 없다, 여긴 있다. 대신 여기엔 싹이 난다. 그쪽에는 싹이 트지 않는다.
한 줄짜리 메시지가 두 개의 세계를 정의하고 있었다.